여름내 입었던 반소매 옷이 낯설어지더니, 가볍게 걸친 점퍼의 촉감마저 차가워졌다. 겨울이 오는 길목은 늘 그렇듯 특별한 게 없는데, 웬일인지 마음이 함께 움츠러드는 듯했다. 최근 몇 달 동안 참가한 탁구대회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막 플레이에 기분이 쭉쭉 떨어지는 것이, 지금은 제일 밑바닥까지 내려간 기분이다. 뜨거운 열풍에 쪼그라든 니트티처럼 마음은 딱딱하고, 몸은 뻣뻣하다.
2025년 10월 25일과 26일, 이틀간 올해 마지막 승급대회가 열린다. 제주생활체육 탁구 초보그룹인 9부(오름부)에서 8부(금강부)로 올라갈 수 있는 대회다. 나는 지금 절망의 계곡 한가운데 서 있다.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숲이라도 들어가면 좋으련만, 매번 황당한 경기들을 해대다 몸이 얼어버렸다. 굳어진 몸은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편히 해야 하는데, 몇 달 새 만지면 바스락 부서질 것 같이 얇아진 멘털은 나를 자꾸 작게 만든다.
10월 25일, 대회 첫날, 개인전이 시작됐다. 예선전에서는 3명 중 2명이 본선 토너먼트에 올라간다. 명단을 살폈다. 한 명은 내가 아는 실력자, 다른 한 명은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그녀가 새로운 다크호스라면 나는 예선 탈락이 분명했다. ‘그럴 수도 있지. 남들은 다 늘어도 나는 되려 퇴보하는 실력인 것을’ 어두운 기운이 나를 덮쳤다. 그런데 한 명이 기권하고 실력자와 내가 1, 2위 순서를 다투게 됐다. 음산한 기운이 안내하듯 나는 예선 조 2위로 본선에 올랐다. 하지만, 32강에서 3대 0으로 패하며 승급은 더 이상 나와 상관없게 됐다. 11점을 먼저 가는 경기에서 상대 공 리시브 실패가 빈번했고 어쩌다 랠리가 될 때면 달려드는 플레이로 공격 점수를 내줬다. 공에 쫓겨 우왕좌왕하다 게임이 끝났다. 11점은 그리 큰 숫자가 아니었다.
8부 승급을 위해 필요한 점수는 4점. 나는 현재 2점을 가지고 있다. 올해 첫 승급대회에서 8강에 들면서 1점을 얻었고, 두 번째 대회에서도 8강에 올라 1점을 받았다. 오늘이 세 번째이자 2025년 마지막 대회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8강에 두 번 올라간 건 2025년 최고의 ‘운’이었다. 그때는 이제 내 실력이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마구잡이 탁구에 장승처럼 서 있는 다리를 보니 정녕 나의 착각이었다. 상대가 그렇게 높은 벽도 아니었는데, 나는 절망의 계곡 가장 깊은 골을 지나고 있었다.
첫날 대회가 끝나고 사람들은 저녁을 먹으러 갔지만, 나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대회 이튿날은 단체전이다. 3단식으로 진행되는데 우리 팀은 4명이 신청했다. 무서워졌다. ‘이 실력으로 뭘 해, 내일 단체전에 나가지 말까? 내가 빠져도 3명이니까 상관없잖아.’ ‘말도 안 돼. 이미 신청했잖아. 너 오름부장이잖아. 혼자가 아니라고’ 복잡한 생각이 뒤섞였다.
마음마저 불안해졌다. 방안을 서성이다 라켓을 잡고 거울 앞에 섰다. 스텝을 밟았다. 대회 때 꿈쩍 않던 다리가 잘 움직였다. 화가 났다. ‘이게 왜 안돼! 왜 안 되느냐고! 너 바보야?’ 경기에서는 스텝은커녕 팔만 휘두르다 온다. 레슨 때 정답이 게임만 하면 오답이 된다. 휘두르는 라켓에 공은 네트에 걸리거나 멀리 떠나가 버린다. 거울 속의 내가 멍하게 보였다. 그때, 단톡방에 메시지가 떴다. “갑자기 집안일이 생겨서 내일 단체전 못 나가겠어요” 이런! 최소 3명은 필요하다. 이제 내가 빠질 수는 없다. 빠르게 어리석은 생각을 접었다.
대회 둘째 날, 단체전이 시작됐다. 3단식으로 진행되는데 3번의 단식경기 중 2명이 이기면 토너먼트에 올라간다. 우리 팀은 조 2위로 본선에 진출했다. 한 명이 지더라도, 두 명이 이기면서 그렇게 서로 도와가며 우리 팀은 올라가고 올라갔다. 드디어 준결승전. 상대 팀은 어제 개인전 우승자가 있는 강팀이다. 두 팀이 서로 맞붙을 순서를 정했다. 번호가 공개됐다. 개인전 우승자는 1번. 우리 팀 1번은 나였다. 개인전 우승자는 이번 대회가 끝나면 바로 8부로 승급이기에 그녀에게 오늘은 9부(오름부)에서 마지막 경기가 될 터였다.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한숨은 아니었다. 그냥 깊은숨이었다.
‘절대 3대 0으로 지지는 말자. 한 세트만, 한 세트만 가져오자’ 그녀는 회전이 걸린 공도 잘 올려서 넘긴다. 뜨는 공을 스매싱도 잘한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몸놀림도 경쾌하게 공도 잘 받는다. 지금까지 그녀와의 게임 전적으로 봤을 때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복잡해졌다. 그래도 그냥 지기는 싫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중간 정도 길이의 낮은 서브를 넣었다. 처음부터 공격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저 공을 지켜야 한다. 조심스러워졌다. 상대 라켓을 보고, 상대가 친 공을 보고, 내게 온 공을 보고. 지금까지처럼 아무렇게나 ‘팍’ 치면 안 될 거란 걸 직감했다. 한 세트라도 가져오려면 예전의 플레이와는 달라야 한다. 서브권이 오자 공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별생각은 없었다. ‘뭐 넣지? 어떤 서브를 넣지?’ 서브도 잘 받는 그녀라 자칫 위험하게 서브를 넣었다 내가 점수를 잃을 수 있다. 안전하게 자신 있는 서브만 넣었다. 그리고 리턴되는 공을 기다렸다. 함부로 덤비지 않았다. 부드럽게 넘겼다. 그리고 또 넘겼다. 1세트가 끝났다. 심판이 내 점수판에 1을 넘기고 있었다. 내가 이긴 거야? 한 세트? 정말? 오늘의 소임을 다한 듯했다.
2세트가 시작되자 자연스레 안전 중심의 집중 모드가 이어졌다. 그녀가 서두르기 시작했다. 무리한 공격이 네트에 걸렸다. 2세트가 끝났다. 심판이 내 점수판에 2를 넘기고 있었다. 2세트도 이긴 거야? 3세트가 시작됐다. 5판 3승의 경기다. 설마 내가 이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니야, 잊어. 지금이 첫 세트야. 라켓 들고 준비해!’ 내가 공격할 수 있는 공이 올 때까지 공을 넘겼다. 또 넘기고, 또 넘겼다. 때가 왔다. 백스윙하며 공을 앞으로 보냈다. 들어갔다. 신기했다. 10대 10 듀스. 이번엔 그녀가 공을 때렸다. 네트에 걸렸다. 11대 10. 다시 공이 그녀에게 넘어갔다. 그녀가 또 때렸고, 또 걸렸다. 데자뷔 같았다. 12대 10. 3세트가 끝났다. 내가 이겼다.
내가 뭘 한 거지? 늘 내가 해왔던 실수처럼, 상대의 실수가 내게 승리를 주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안전하게 하자는 생각뿐이었는데, 뭔가 잘못된 거 같았다. 내가 이길 리 없는데 뭐지? 어젯밤 거울 앞에서 나를 원망했던 내가, 그런 내가 이겼다고?
정신이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살포시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언니, 저랑 오름부 마지막 경기 같이 해줘서 고마워요. 승급 축하드려요.” “응 고마워, 그런데 공이 예전이랑 너무 다른데. 오늘은 도무지 네 공을 칠 수가 없었어. 공을 치게 안주네.”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뭐가 달랐을까? 하룻밤 사이에,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