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큰애 고등학교 졸업식이다. 꽃다발을 들고 온 가족이 학교로 출동했다. 체육관에서 진행된 학생들의 영상과 고별사, 교장 선생님의 회고사, 표창 수여가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 학급별 송별회가 이어졌다. 마지막은 가족, 친구들과의 포토타임이었다. 축제 같은 졸업식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빛나는 졸업장을 받아 든 우리에겐 오늘의 중요한 일정이 남아있었다. 바로 탁구장에 가는 것.
어제 일이다. 방학을 맞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아들에게 말했다. “방학 동안 탁구 레슨을 받아보는 거 어때? 초등학교 때 몇 달 배웠으니까 지금 다시 배우면 몸이 기억할 수도 있잖아”
“엄마! 저 탁구 잘 쳐요.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쳤는데 제가 이겼어요. 엄마도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은 학교에서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탁구를 했고, 나름 초등학교 때 배운 기억을 활용하는 듯했다. “그래? 우리 아들이랑 실력 한번 겨뤄 볼까? 내일 어때?” “좋아요” 옆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남편이 당당하게 대화에 합류했다. "아빠도 잘 쳐. 아빠는 군대에서 125명을 이겨서 특별휴가도 나왔어. 폼은 별로지만 점수 내는 건 잘한다고." 이 부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비록 초보 오름부지만 벌써 구력이 몇 년인데. 나름 오름부에서는 좀 치는 사람이라고. 내 앞에서 서로가 나를 이길 수 있다 장담하는 남편과 아이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남편과 나는 지는 사람이 저녁을 사기로 했다. 사실 저녁보다 중요한 건 우리 집 탁구강자를 가리는 일이었다. 바로 그날이 오늘이다.
탁구장에 가기 전 서둘러 집에 들러 탁구 장비를 챙겼다. 확실히 보여줄 기회였다. 대회 때마다 상심하고 탁구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나에게 “그렇게 힘들면 그만하지, 당신한테 맞는 운동이 아닐 수 있어.” 이렇게 위로했던 ‘남’ 편이다. 한술 더 떠 “오늘 내가 이기면 어떡하지”라는 걱정 아닌 걱정까지 하고 있다. 확실한 우위를 보일 기회였다. 그간의 노력을 증명할 순간이기도 했다. 군대 탁구와 배운 탁구의 차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경기결과가 말해줄 터였다.
아빠와 아들의 대결이 시작됐다. 아빠는 고무가 한쪽 면만 있는 펜홀더 라켓을 들었고 아들은 양면 다 쓸 수 있는 셰이크 형을 잡았다. 둘 다 라켓 잡은 팔은 허수아비처럼 벌어져 있고, 엉덩이도 뒤로 빠진 모양이 엉성하다. 그런 폼으로 무슨 점수를 내겠다고? 남편이 백스핀 공을 보내자 아들은 계속 네트에 공을 꽂았다. 공의 구질을 모른 거다. 백스핀이 걸린 공은 공의 아래쪽을 쳐야 네트를 넘어간다. 학교에서 같이 친 친구들도 다 비슷하니 '백스핀'에 대해 알 리가 없을 터였다. 아들은 공이 네트에 걸릴 때마다 연거푸 말했다. “왜 안 들어가지?, 왜 안 들어가지?” ‘아들아! 공은 그렇게 치는 게 아니란다. 100번 쳐도 그 공은 안 들어갈 거야’ 결과는 아빠의 완승이다.
다음은 남편과 나의 대결이다. 우리집 탁구강자는 여기서 결정된다. 회심의 빠른 서브를 넣었다. 기대대로 남편은 못 받았다. 이번엔 다른 서브를 넣었다. 또 못 받았다. 이렇게 심심할 수가. 몇 번 남편의 공이 들어왔지만 나는 그때마다 서브를 바꿨고, 그의 공을 되받아 넘겼다. 3대 0. 너무 쉽게 왕좌에 오르는 듯했다. “이제 당신이 어떻게 공을 치는지 알겠어. 게임 다시 해봅시다.” 내가 어떻게 공을 치는지 파악했다고? 나를 관찰했다고? 하지만 어차피 3대 0으로 이길 게 뻔한 경기다. “오케이, 다시 합시다.”
회심의 빠른 서브를 넣었다. 이번엔 남편이 공을 받았다. 어라! 돌아오면 안 되는 공인데. 내가 쳤다. 날아가 버렸다, 아들이 남편의 점수판에 점수를 올렸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남편의 점수판은 올라갔다. 내 팔은 힘이 들어갔고, 실수는 더 많아졌다. "왜 안 들어가지?" 이번엔 아들이 아니라 내가 말하고 있었다. 남편은 요리조리 내 공을 잘만 받았다. 1세트, 2세트, 3세트가 끝났다. 3대 0으로 내가 졌다. 망연자실했다. 승패를 인정하기엔 너무 당혹스러웠다. 남편이 이길 확률을 생각하는 거조차 의미 없다고 생각했건만, 뭐가 그리 자신 있었을까. “다시 해요. 내가 실수가 많았던 거 같아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해야지요” “그럽시다”
남편이 서브했다. 내 오른쪽으로 오기에 ‘이때다’ 하고 팔을 휘둘렀다. 공이 유유히 라켓 옆으로 지나갔다. 옆으로 회전이 걸린 공이었다. 그가 보내는 공은 직선으로 오지 않고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휘면서 들어왔다. 휘는 게 눈에 보이는데도, 회전이 그리 강하지 않은데도 나는 계속 헛스윙에 박자를 놓치고 있었다. 아들은 남편의 점수판을 계속 올렸고, 간혹 내 점수판도 올렸다. 1세트, 2세트, 3세트. 모두 그가 이겼다. “이제 가자! 저녁은 엄마가 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남편이 힐끔 나를 쳐다봤다. “져줄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