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식구들이 뭉쳤다. 내 생일날.
전주에 사는 여동생네가 제주에 오는 일정에 맞춰 가족 모임을 잡은 덕에 어쩌다 내 생일이 가족 이벤트가 됐다. 초등학교 2학년 조카부터 올해 83세인 아빠까지 열두 명의 가족이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1박 2일 나들이에 나섰다. “내일 칫솔, 치약 챙기고 와, 요즘 일회용품 안 쓰는 추세라서. 워터파크에서 입을 수영복도 잊지 말고!” 단톡방에 이번 일정을 준비한 남동생이 준비물을 알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늘 엄마의 챙김을 받아온 우리 형제들은 성격이 그리 촘촘하지 못하다. 서로를 잘 알기에 매번 단톡방에 주의사항이 올라온다. “챙긴 줄 알았는데 없네” “괜찮아, 편의점 있을 거야. 거기서 사면되지.” 아니나 다를까 여동생네는 공들여 챙긴 수영복 가방을 집에 고스란히 두고 가볍게 비행기를 탔다. 나 역시 캐리어를 열어보니 잠옷 바지만 있고 상의는 없다. 치약은 있는데 칫솔이 없는 사람도 있다. 이런 자잘한 빠트림은 우리에게 대수롭지도 않다. 어딜 가나 열두 명 인원만 정확하면 만사 오케이다.
워터파크에 입장한 어린 조카들은 신이 났다. 엄마와 아빠는 일찌감치 수영복 패션으로 변신했다. 80대라고 구경만 하는 건 섭섭하다. 움직일 수 있는 동안은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확실한 부모님이다. 하늘 위에 떠 있는 듯 지대가 높은 야외 수영장에서는 시원한 풍경이 내려다보였다. 바람이 아직 싸한 2월이지만 온수 풀은 따뜻했다. 다들 수영 실력을 뽐냈고, 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슬로우 워킹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몸이 풀리자 우리는 실내 워터파크로 이동했다. 조카들은 쪼르르 달려가 튜브 타기에 줄을 섰다. 한 사람씩 물살을 타고 내려오는 놀이기구다. 난 스릴을 즐기지 않는다. ‘아이들이 타는 거 보니 괜찮은가?’ 12명 모두 줄을 섰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나도. 직원이 출발 버튼을 누르기 전 살짝 후회스러웠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고’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는데, 나보다 먼저 내려온 부모님은 웃고 계시다. 머쓱해진다.
다음은 4인용 튜브 타기다. “이거 꼭 타야 해?” “누나, 이거 4명씩 타는 거야. 12명이니까 딱 맞잖아. 재밌으니까 걱정하지 마” 남동생의 말에 해맑게 즐거워하는 조카들을 보며 안심하고 몸을 맡겼다. 튜브에 올라타자 급물살처럼 후회가 밀어닥친다.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 순식간에 종착점에 도달했다. 온 힘을 다해 튜브 손잡이를 잡았던 팔이 아려온다. 뒤이어 내려온 부모님이 걱정돼 돌아봤다. 두 분은 또 웃고 계셨다.
이튿날 일정은 놀이공원이다. 내 생일 이벤트인데 조카들이 더 좋아한다. 난 고소공포증이 있어 거꾸로 도는 기구는 도무지 죽을 거 같아 절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놀이공원에 가서도 내가 타는 건 가만히 앉아 쭉 가는, 편안한 관광기구들이다. 이를테면 회전목마.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이 달려간 곳은 회오리바람처럼 180도 돌아가는 놀이기구다. 아이들이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는 동안에도 멀미가 났다. “누나, 이번 거는 무섭지 않은 거야. 시간도 짧고. 한 번에 12명 타는 거니까 우리 가족 전부 타면 돼” 내가 고민하는 사이 부모님은 벌써 줄을 서 계셨다. “아빠!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괜찮지. 안 괜찮으면 이런 거 못 타지” 조카들만큼 즐거워 보인다. 내가 빠져선 결코, 안 될 거 같다. 드디어 탑승. 천천히 아래로 기차가 내려가는 거 같더니 순식간에 원을 그리며 달려간다. 몸은 하늘로 붕 떴다가 내려오고 심장은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정신을 잘 붙들어야 하는데. 결코, 내가 밖으로 튕겨 나갈 일은 없단 걸 알면서도 이제 곧 몸이 저 멀리 날아가 버릴 거 같다. 으으으. 끝났다. “아이코” 아빠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걸어 나오시며 웃고 계신다. 아빠는 언제부터 이렇게 놀이기구를 잘 타셨을까? 그 시절 제주에 놀이동산 같은 건 없었는데.
겁 많은 것과 달리 아빠와 내가 닮은 것을 찾는다면, 바로 책이다. 아빠는 책을 좋아하신다. 그중에서도 아빠의 일등 애착 책은 ‘논어’다. 지금까지 백 번은 족히 읽으신 거 같다. 좋은 구절은 반복해서 필사하기에 노트도 빼곡하다. 늘 쓰고, 늘 읽는다. 덕분에 초등학생 손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맞춤형 대화도 능하시다. 아빠가 서재에서 하는 또 하나의 놀이는 컴퓨터 고스톱이다. 고스톱 놀이는 아빠와 컴퓨터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줬다. 아빠에게 컴퓨터를 모른다고 말한다면 섭섭하다. 아빠는 골프도 좋아한다. 매일 규칙적으로 연습장에 가시고,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필드에 나간다. 작년 82세 때 홀인원을 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만보 걷기 또한 아빠의 하루 루틴이다. 저녁이면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고, 비 오는 날에는 집 테라스를 몇 바퀴씩 걸으신다. 그렇게 다져진 체력으로 아빠는 우리와 함께 롤러코스터를 탔다.
놀이기구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안도했다. 뒤이어 따라온 건 메슥거림과 어지러움이었다. 그런데 아빠는 달랐다. “날아갈 거 같더라”
그 순간 아빠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주름진 이마에도 신나하는 눈빛이 아빠는 여전히 80대 청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