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요즘 눈이 잘 안 보인다. 교정시력 1.0이면 상당히 좋은 시력이라고 생각했건만, 사무실에서 글자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자료를 눈에서 멀리 가져간다. ‘왜 이렇게 글이 안 보이지?’ 하고 안경을 벗어보면, 시원스레 글자가 들어온다. 처음에는 내 눈이 좋아진 것이 아닌가 했다. 깜찍한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안경을 벗고도, 저만치 소파에 앉아있는 아이의 눈코입이 뚜렷이 보여야 한다. 그런데 내 시선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지만, 정작 눈동자는 잡히지 않는다. 눈을 마주칠 수 없다.
얼마 전 직장에서 교육이 있었다. 자료화면을 볼 때는 대학생처럼 또랑또랑하게 칠판을 보던 내가, 책상 위 교재를 볼 때면 안경을 벗고 책에 얼굴을 파묻었다. 까막눈이 따로 없다. 그러다 강사가 다시 자료화면으로 설명을 시작하면 얼른 안경을 챙겨 쓰고 수업에 집중했다. 이젠 보는 일마저 예전 같지 않은 걸까. 그러고 보니 공부에도 때가 있다는 것을 옛날 어른들은 알았던 거 같다.
마음은 여전히 배우고 익히는 학생인데, 내 몸은 따박따박 시간의 속도에 맞춰가고 있다. 해가 바뀔 때마다 하나씩 더해지는 신체의 나이다. 마음은 아닌데, 받아들이기엔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잠깐만요!’라고 외쳐보지만 부질없다. 내 삶에 이런 과정이 있으리라곤 생각해 본 적 없기에 답답한 노릇이다.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살면 세상을 젊게 사는 거로 생각했는데 나의 몸과 마음은 하나가 아닌 듯하다.
탁구장에서 한 회원이 핸드폰 문자를 보내기 위해 안경을 썼다. 평소에 안경을 쓰지 않는 회원이라 그 모습이 낯설었다. 옆에 있던 다른 회원이 말했다. “나는 노안이 와서, 다초점렌즈로 안경을 맞췄어. 그런데, 경기할 때 공을 치려고 위를 쳐다보니까 탁구공이 여러 개 떠 있더라고. 어쩔 수 없이 탁구 칠 때 쓰려고 안경을 다시 맞췄어.” 일상생활에서는 유리한 면이 많은 다초점렌즈지만 시선에 따라서 거리감과 초점이 달라지기 때문에 운동할 때 쓰기엔 적당하지 않다는 게 그의 조언이었다.
경제적·사회적 외투를 벗겨내면, 순수한 인간의 모습은 시간이 갈수록 공평해진다. 문자를 보내기 위해 안경을 쓰던 사람은 안경을 벗어야 하고, 안 쓰던 사람은 써야 하니 말이다. 어쩌면 ‘눈’은 나에게 나이 듦이란 이런 거라고 먼저 말을 건넨 나의 일부일 것이다. 어느 순간 사람들의 말소리도 옅어지고, 또렷했던 기억도 흐릿해지겠지.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 소중한지도 모른다. 흘러내린 안경을 계속 올리면서도 탁구를 할 수 있고, 안경을 벗고서라도 책을 읽을 수 있고, 탁구공을 치기 위해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이 모든 것이 내가 받은 선물이고, 내가 누리고 있는 축복이란 걸 느낀다. 이런 마음들이 오늘도 나를 어른으로 만들고 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