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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라 Jul 08. 2024

잠시 쉬어 갑니다.

계단에서 만난 불청객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모두 때가 있다는 걸 느낀다.


퇴근하다 무릎을 다쳤다.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굴렀다. 정확히는 구르다가 수족관 벽에 붙은 낙지처럼 팔다리를 뻗고 납작하게 퍼졌다. 안경도, 가방도 날아갔다. 다리를 끌며 기어가 안경을 집었다. 다행히 안경알은 안경테 옆에 꼭 붙어 있었다. 안경을 얼굴에 씌우고 주섬주섬 가방을 잡고 일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엔 놀랄 사람도 웃음을 터뜨릴 사람도 없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별관 계단에는 나 혼자였다. 무릎이 찢겨나가는 거 같았다. 아팠다.


운전하며 집에 오는 동안 브레이크 페달을 밟는 오른 무릎의 통증에 나도 모르게 ‘악!’ 하고 소리가 났다. 차를 버리고 싶었다. 조금만 가면 도착이라고 생각하며 버텼다. 집에 돌아와 상태를 보니 팔꿈치와 왼쪽 무릎은 피부가 벗겨졌고, 오른쪽 무릎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침대에 눕자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피로가 몰려오는 듯했고 이내 잠이 들었다. 내일이면 다 낫기를 바라며.


아침이 되자 통증은 더 셌다. 어젯밤에 보이지 않던 피멍이 왼쪽 무릎 전체에 퍼져있고, 오른쪽 무릎은 여전히 뜨거웠다. 어제 흐르던 피는 밤사이 굳어 있었다. 병원에 가야 한다는 건 알았지만 오전에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왜 이리 컨디션이 안 좋은 날 아침은 매번 중요한 일정이 있는지. 그때마다 나는 과감히 떨치지 못하고 성실하게 출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날도 난 그렇게 출근하고 있었다.


일정이 끝난 후 병원에 갔다. 골절은 아니라는 말에 ‘상처만 나으면 탁구는 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그래도 다행이었다. 작은 기쁨도 잠시, 아이스하키선수 무릎 보호대처럼 두껍고 투박한 장비를 무릎에 착용했다.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이 여름이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난 탁구대회의 예선탈락을 곱씹으며 결의를 다진 지 일주일 만이었다. 지금 난, 나의 부주의에서 비롯된 연금상태다. 앞으로도 회복하는데 몇 주, 아니 몇 달은 더 걸릴지 모른다. 의사는 움직이지 않고 지낸다면 조금은 빨리 나을 수 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천천히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지켜봐야겠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다. 나는 3주째 편안하지 못하다. 이제 걸을 수는 있지만 짜릿짜릿한 통증이 삐쭉삐쭉 얼굴을 내민다. 나도 모르게 걸음걸이가 절뚝거린다.


멈추지 못하는 나의 탁구 사랑을 질투라도 하는 것인지, 작년부터 달려온 나를 위한 쉼의 선물인지 알 수 없다. 계단 아래의 철퍼덕이 행운일지 불운일지는 내가 선택할 몫이다. 레슨을 받으러 탁구장에 갔고, 레슨이 없는 날도 연습하러 갔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그리해야 할 것 같았다. 탁구장에 못 가는 지금,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시간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무언가 하지 않을 자유는 할 수 있는 자유보다 더 자유롭다. 계단 위에서 만난 불청객은 나에게 당황스러움을 선물했고, 선명한 통증도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조용한 저녁을 불쑥 내밀었다. 때로는 삶이 단순함과 고요로 채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내게 알려주려는 듯 말이다.


‘계단에서 만난 불청객’은 구름과 닮았다. 구름은 비밀이 많다. 구름은 속을 알 수 없다. 그 속에서 천둥이 나올지 햇살이 나올지 모를 일이다. 구름은 그 형체 없음에 자유롭고 아름답다. 구름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구름이 머물다간 자리는 새롭고 변화무쌍하다.


구름이 머무는 동안 부모님과 아이들, 가족들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 책을 읽고 사색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다. 탁구장에서 뛸 일도, 파이팅을 외칠 일도, 땀에 흠뻑 젖을 일도 없겠지. 아마도 매일 뽀송뽀송한 저녁을 만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올 휴식이 반가울지, 서운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어찌 됐든, 구름이 걷힐 때까지, 아 나의 무릎이여! 우리 잠시 쉬어가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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