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03] 호르몬의 파도를 지나며

내 몸 사용 설명서

by Irene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제까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감정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불안, 예민함, 생각의 꼬리물기, 이유 모를 분노 같은 것들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너무 극적인 변화라 오히려 멍해질 정도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모든 변화가 몸에서 시작되었다는 걸.


사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매달 겪는 마법 전후의 정서적 변화. 늘 겪는 일이면서도 매번 당황스럽다. ‘왜 이렇게 사소한 일에 흔들리지?’ ‘왜 나만 이렇게 예민하지?’ 하고 자책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평소보다 훨씬 더 깊고 강하게 흔들렸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며칠간 계속된 비 때문에 운동을 못 했던 게 컸던 것 같다. 고작 4일이었는데, 그동안 차곡차곡 쌓였던 감정들이 터지듯 올라왔다. 평소에는 지나갔을 일에 괜히 마음이 상하고, 오래전 일이 불쑥 떠오르고,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생각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억지로 생각을 멈추려고 해도 잘 안 됐다. 자꾸만 옛 감정들이 되살아났고, 감정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지배했다. 그 상태에서는 어떤 논리도 통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런 순간마다 내가 약하다고 느꼈다. 정신력이 부족하거나, 마음을 단단히 다잡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한순간에 모든 게 가라앉은 걸 느끼고 나니 그것이 순전히 ‘의지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감정을 만드는 건 생각이 아니라 몸

호르몬은 생각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마법 전후로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급격히 변할 때, 뇌 속의 신경전달물질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감정 조절이 어렵게 된다. 특히 에스트로겐은 세로토닌 분비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수치가 떨어지면 우울이나 불안감이 훨씬 더 쉽게 올라온다. 그 상태에서는 내 평소의 사고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원래는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말이나 상황도, 유독 날카롭게 느껴진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각의 루프가 깊어지고 과거의 일까지 되살아난다.


여기에 운동을 못 했던 것까지 겹치면서, 평소에는 잠잠하게 흘러갔던 감정의 파도가 훨씬 거세게 밀려왔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니 자연스럽게 스트레스 해소가 되지 않았고, 몸이 무겁고 답답한 상태에서 감정은 점점 더 위로 솟구쳤다. 운동은 단순히 체력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나에게는 정서적 균형을 위한 가장 확실한 도구라는 걸 다시 느꼈다.


또 하나 느낀 건 식단의 중요성이었다. 비교적 건강하게, 정제되지 않은 음식을 중심으로 식사를 하고, 군것질도 줄인 달은 호르몬의 급격한 변화가 없다. 그럴 땐 감정의 변화도 훨씬 덜했고, 몸의 리듬도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그런데 원래 간식을 잘 안 먹는데 이번 달 맛있는 딸기 케이크를 조금 먹었다 보니 확실히 몸이 빠르게 영향을 받는 걸 느꼈다. 특히 설탕이나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은 먹고 나면 몸이 먼저 무거워지고, 그다음에 감정도 빠르게 가라앉는다. 단 음식이 위로가 될 거라 생각하고 찾지만,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만들었던 것 같다.


결국 감정의 문제처럼 보였던 것들이, 식습관과 운동, 호르몬이라는 몸의 조건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감정을 억누르려 애쓰는 것보다, 그 감정을 만드는 뿌리를 이해하고 정리하는 게 훨씬 건강한 방법이라는 걸 이번에 실감했다.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 자신을 비난하거나 억지로 이겨내려 하지 않고, ‘지금 내 몸이 어떤 상태였는가’를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했다.


"나는 괜찮다"보다 더 중요한 것

이런 날들이 올 때마다, 스스로에게 "나는 괜찮아"라고 말해왔다. "이건 내가 아니야, 그냥 예민할 뿐이야"라고 되뇌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말들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그 말보다 더 강한 건, 실제로 내 몸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인 말을 반복해도, 몸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는 생각도, 감정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진짜 힘은, 내 몸을 돌보는 데 있었다.


이제는 알 것 같다. 그 시기의 나는 내가 아니라 ‘몸이 그렇게 반응하고 있는 나’일 뿐이라는 것. 그게 진짜가 아니고, 지금의 내가 진짜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오히려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둘 다 나였고, 그저 흐름과 조건이 달랐던 것뿐이다. 몸이 안정되면 마음도 따라 안정된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복잡했던 감정들도 자연스럽게 흩어진다.


앞으로는 이런 시기를 미리 예상하고, 조금 더 나를 배려하며 보내고 싶다. 운동을 멈추지 않고, 식단을 가능한 한 단순하고 깨끗하게 유지하고, 몸이 보내는 신호에 민감해지기. 그러면 감정이 크게 요동칠 때도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내 몸을 아는 것, 내 몸을 돌보는 것, 그리고 그 몸이 바탕이 되어 만들어지는 마음을 함께 이해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번에 다시 배운 ‘내 몸 사용 설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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