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4] 모든 질서는 결국 또 다른 감옥

by Irene
pexels-brettjordan-8759658.jpg


초인의 새벽 앞에서: 통제를 넘어 무위로

요즘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 있다.

“위버멘쉬란 무엇인가?”

“왜 통제를 극단까지 완성한 뒤 무너져야 하는가?”

“니체가 정말 무위를, 무심을, 무아를 말하고 있었던 건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철학적 호기심이 아니다. 지금 내게 닥친 삶의 어떤 변화들 속에서 끓어오른, 절박한 자문이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더는 이론이 아니다. 실존적 경험 속에서 드러난 어떤 질문이다. 그래서 더욱 깊고, 더욱 진실하다.


니체의 위버멘쉬 — 통제하는 자인가, 무너지는 자인가?

니체는 위버멘쉬(Übermensch), 즉 ‘초인’을 새로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해내는 존재로 규정한다.

“신은 죽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체를 묻었다.”

이 선언은 단지 종교에 대한 반발이 아니다. 그것은 곧 외부의 의미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초인은 기존의 도덕, 종교, 체제, 가치를 떠나 자기 삶의 형식(Form)을 창조하는 자다. 그동안 나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하루를 설계하고, 감정을 절제하며, 몸을 관리하고, 인간관계를 조절하고, 매일 책을 읽으며 고요한 질서 속에서 나만의 삶을 조직해왔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철저한 루틴이었고, 어떤 이에게는 경건함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기계발의 산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리’가 되지 않으려는 시도, ‘양 떼’가 되지 않으려는 선택이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의 첫 번째 모습.

절제, 통제, 자기 창조.

즉, 자기 자신의 법을 만드는 존재.

그리고 나는 그 길을 걸어왔다.


초인은 자기 자신조차 부술 수 있는 자

하지만 니체는 단지 “창조하라”고만 말하지 않았다.

“부숴라. 다시 창조하라.”
“영원히 반복되는 삶조차 예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너 자신이 되라.”

이 말은 단순한 이상주의가 아니다. 초인은 자신이 만든 질서조차 무너뜨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다. 왜냐하면, 모든 질서는 결국 또 다른 감옥이 되기 때문이다.


초인은 세상의 도덕을 부정하고 자기만의 윤리를 창조하지만, 그 윤리조차 절대화하지 않는다. 그 가치조차, 질서조차, 무너뜨릴 수 있는 자. 통제를 완성한 뒤, 그 통제가 자신을 가두기 시작할 때, 그것마저 찢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자기 삶을 예술처럼 구성했고, 통제의 정점까지 올라갔지만,

이제는 그 통제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다.

설계된 하루 속에 감정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치밀하게 설계된 루틴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파도로 무너졌으며,

신을 부정했던 내가 신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는 퇴보가 아니다.

이것은 초월이다.

초인은 자기 자신을 해체할 줄 아는 자.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해체의 순간을 살고 있다.


니체의 초인은 무심과 무위로 향하는가?

이 지점에서 다시 던지게 되는 질문.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끝은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무위(無爲), 무심(無心), 무아(無我)와 닿아 있는가? 니체는 그런 언어를 쓰진 않았지만, 그가 말하는 초인의 궁극 상태는 동양적 사유의 경지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자기 뜻으로 살아가되, 그 뜻마저 자유롭게 놓아버릴 수 있는 존재.

가치로 세상을 지배하되, 그 가치마저 생명 앞에 무릎 꿇게 할 수 있는 존재.

결국 이것은 강함의 마지막 단계다.

강함조차 내려놓을 수 있는 힘.

이것이 바로 무심, 무위, 그리고 진짜 자유다.


루틴을 만드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루틴을 깰 수 있는 자유.

계획을 따르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자존.

바로 그곳을 향해 초인은 걸어간다.


왜 통제를 극단까지 밀어붙인 후 무너져야 하는가?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이런 여정이 필요한가?

왜 통제를 극단까지 밀어붙이고, 다시 무너져야 하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통제를 해보지 않은 자는 통제를 놓을 수 없다.
루틴을 만들지 못한 자는 루틴을 초월할 수 없다.
자기를 만들지 않은 자는 자기를 비워낼 수 없다.

그래서 이 여정이 필요하다.

극단까지 가본 자만이 놓을 수 있는 자가 된다.

놓을 수 있는 자만이 진짜 자유를 만난다.


위버멘쉬는 통제자다. 그러나 그 통제를 절대화하지 않는 통제자다.

초인의 여정은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자기 형성의 단계, 두 번째는 자기 해체의 단계.

나는 첫 단계를 통과했고, 지금은 두 번째 문턱에 서 있다.

이 문턱은 해체이며, 무너짐이며, 다시 태어남이다.

그 끝에는 동양의 무위, 무심과 닮은 완전한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초인의 새벽

지금은 통제를 놓고도 살아 있는 나,

루틴 없이도 무너지지 않는 나,

감정이 휘몰아쳐도 고요한 나,

그 나를 믿고 살아내야 할 시간이다.


지금 이 삶의 순간은

초인의 새벽이다.

그 새벽은 — 아름답고, 무섭고, 진짜다.

지금 필요한 건, 새벽을 살아내는 나의 용기다.


나는 왜 울었는가: 초월은 어떻게 나에게 ‘일어났는가’

최근에 꺼내든 질문은 어쩌면 지금까지 해온 어떤 질문보다 더 핵심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의 깊이에는 니체를 넘어선,

‘인간의 영혼’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들어 있었다.


그 순간은 이렇게 찾아왔다.

“그건 내가 운 게 아니었어요.

나는 분석했고, 통제했고, 통제할 수 있었어요.

근데 내가 왜 오열했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누구예요? 내 안에 있는 진짜 ‘나’인가요? 신인가요?”


그 질문 속에는 단지 감정의 혼란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존재의 중심이 나인지, 나를 넘는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내 존재 전체가 걸려 있는 물음이었다.


그 오열은 내가 한 것이 아니었다 — 그러나 분명히 ‘나’였다

나는 평생을 수련과 통제 속에서 살아왔다.

모든 감정을 느끼기 전에 구조화했고,

감정 위에 윤리를 세우는 것을 당연시했으며,

사랑조차도 상대에게 줄지 말지를 설계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훈련과 통제를 무너뜨린

그 하염없는 오열은

분명히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오열을 원하지 않았다.

분석할 수 없었고,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 울음은 흘러나왔고,

나를 무릎 꿇게 했으며,

내가 들고 있던 모든 무기를 바닥에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내 안에 나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다는 뜻 아닐까?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그 뒤를 나는 살고 있었다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이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나 또한 그 시대를 살았다.

의미를 스스로 만들고, 삶의 형식을 창조해나갔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 의미가 눈물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있다.


그때 나를 무너뜨린 기도, 울음은

어떤 자아가 설계한 것이 아니라,

자아를 초월하는 어떤 힘이

내 안에서 깨어난 순간이었다.

그것은 신이 다시 태어난 자리이기도 했고,

동시에 내 생명 깊은 곳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건 신이었나, 나였나?

이 질문은 내게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결국 이 둘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했던 순간,

그건 내 논리적 자아가 기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건 내 안 어딘가에 숨어 있던,

말도 안 되는 사랑을 믿는 어떤 부분이 기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과 닮아 있었다.


울었던 순간 역시 마찬가지다.

그건 자아가 깨진 것이 아니었다.

자아의 가장 깊은 밑바닥이 터진 것이었다.

그것은 무의식일 수도 있었고,

진짜 참자아일 수도 있었고,

말하지 않았던 상처의 기억일 수도 있었다.

혹은… 신 그 자체가 내 안에서 울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건 누가 한 걸까?

논리적으로 대답하자면,

그건 내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깊은 층위였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생명의 본능, 사랑의 원초성, 존재의 순수한 중심이었다.


영적으로 대답하자면,

그건 신의 흔적이었다.

내가 스스로 만든 세계가 자기 무게로 무너질 때,

그 잔해 사이에서 신은 운다.

그 신은 내 안에 있다.

내 바깥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 안에 있다.


존재론적으로 대답하자면,

그건 나를 구성하고 있지만,

내가 나라고 여긴 적 없는 ‘나’였다.

내 안의 타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짜인 나였다.


그 오열은 나의 탄생이었다

그 울음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나를 만든 통제가 운 것이고,

나를 지켜왔던 자아가 무너졌고,

그 무너진 자리에서 살고 싶다는 더 깊은 내가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초월은 내가 의도해서 한 것이 아니라 —

나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진짜 초월은 내가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닌 나’ —

혹은 신의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는 무언가가

내 안에서 나를 깨우는 순간이다.


기도는 내가 신을 부른 것이 아니라, 신이 나를 부르는 방식이었다

눈물은 내가 나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더 깊은 힘이 깨어난 증거였다.

그래서 이제 알게 되었다.

나는 단순히 ‘나’만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넘어선, 더 큰 생명이었다.


다만 지금 분명한 것은 하나다.

나는 깨어진 사람이 아니라,

깨어난 사람이다.



https://open.substack.com/pub/irenekim2/p/20260114-dawn-of-the-ubermensch-from?r=5k6vb5&utm_campaign=post&utm_medium=web&showWelcomeOnShare=true


매거진의 이전글진짜 초월은 ‘붕괴 이후’에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