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하지 말라.”

by Irene
millieBook-1749254100817.png
millieBook-1749254113960.png


현자는 조용히 말했다.

“판단하지 말라.”


그 말은 마치 무채색의 호수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조용히 다가왔지만, 그 울림은 깊었다. 처음엔 그저 흔한 조언처럼 들렸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지나면서야 그 말이 건드린 침묵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판단이 멈추는 그 순간, 고요 속에서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판단을 내려놓을 때,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마음속에서 ‘상처’라 불렀던 수많은 것들이 실은 내가 덧씌운 이야기였다는 것을, 그저 한 장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건은 있었지만, 그 해석은 나였다. 감정은 파도처럼 밀려와 기억을 물들이고, 나는 그 물든 기억을 ‘진실’이라 믿었다.


그러나 진실은 파도 아래 잠긴 조용한 바닥에 있다. 그 바닥을 보려면, 물결이 멎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나는 이제야 묻는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는 과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 적이 있었을까? 그 사람의 말, 눈빛, 마음의 진실을, 나는 정말 마주한 적이 있었을까?


아마도 아니다. 나는 늘 무언가를 붙잡았다. 사소한 표정, 말끝의 떨림, 우연처럼 스쳐간 행동 하나. 그리고 그 작은 조각을 실처럼 엮어, 하나의 상상된 진실을 직조했다. 내 안의 두려움과 기대가 색실이 되었고, 결국 나는 내가 짠 상상의 직물을 ‘현실’이라 착각한 채 그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진실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그것을 보려면, 해석을 멈추고 바라보아야 한다.


기억은, 언제나 제 모습을 숨긴다. 마치 유리 너머로 바라보는 풍경처럼 왜곡되고 흔들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장면을 기억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것을 해석한다. 누군가에게는 기적이었던 순간이, 또 다른 이에게는 상처였고, 그 둘 모두에게는 각자의 진실이 된다.


그러니 나는 이제, 진실을 다르게 정의해보고 싶다. 진실은 단 하나의 고정된 점이 아니라, 판단과 해석을 걷어낸 자리. 모든 것이 투명해지는 순간. 그 사람의 진심이 아무 꾸밈 없이, 나에게 그대로 닿는 그 순간.


그러기 위해선 멈추는 용기가 필요하다. 분석하지 않기. 예측하지 않기. 그저 그 순간이 그 순간이도록 두기.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이 일은 왜 일어났을까?” “이 의미는 무엇일까?” 그 질문들을 내려놓고,

그냥 조용히 속삭이자.

“이 일이 일어났구나.”


그리하여 안개를 걷듯, 사건의 얼굴에서 의미의 베일을 벗기자. 그 얼굴은 생각보다 덤덤하고, 생각보다 선명하며, 생각보다 자유롭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그렇다. 그의 말보다 말 사이의 망설임을, 그의 행동보다 행동 너머의 침묵을 느껴보자. 표면의 단서들로 섣부른 이야기를 엮지 말고, 그가 건넨 진심 한 줄기만 붙잡고 깊이 바라보자.


그 진심은 흔들릴 수 있다. 삶은 늘 예측을 벗어나며, 마음도 언제나 완전하진 않다. 그러나 진심은 언제나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길을 내고, 나는 그 길 위에서 기다릴 수 있다.


지금 이 다짐이 모든 것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이 다짐이 내 안에 깊은 뿌리를 내린다면, 나는 더 이상 허상을 따라가지 않고,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진실을 향한 여정은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혁명이다.


그 첫걸음은 단순하다.

판단을 멈추는 것.

그것이 가장 고요하고, 가장 용기 있는 시작이다.


https://medium.com/@irenekim1b/the-quietest-beginning-1b266b151d02


월, 화, 수, 금, 토, 일 연재
이전 09화익숙함을 놓고, 낯섦을 받아들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