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유독 내면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계절이다. 창문을 열면 들어오는 바람은 가볍고 서늘하며, 햇살은 따뜻하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가을은 조용하고 단정하다. 그런 날들을 지나는 동안, 마음속에 자주 떠오르는 한 문장이 있다.
지금 이 하루가 참 고맙다.
꿀잠자고, 상쾌하게 깨어나, 마음에 큰 걱정도 없이, 몸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상태로, 내가 원하는 루틴을 따라 흘러가는 하루. 이 평범하고 단정한 하루가 내가 바라던 삶이고,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가장 진실한 얼굴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던 중, 문득 마음에 파고든 한 문장이 있다.
"조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자."
박진영 님의 인터뷰 속 말이었다. 처음엔 이 문장이 다소 낯설게 다가왔다. 조심하지 않는다는 건 무책임함을 뜻하는 걸까? 아니면 완벽하라는 말일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 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이 말의 진의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아직 내 안에 조심해야 할 요소들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곧 내 말, 감정, 반응이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조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 존재 자체가 이미 정제된 사람. 억지로 인내하지 않아도 온화하고, 계산 없이도 배려가 묻어나는 사람. 감정을 억누르지 않아도 평온할 수 있는 사람. 그는 꾸며내지 않아도 이미 선한 사람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일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특히 ‘무의식’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순간들을. 손이 뜨거운 것에 닿았을 때, 갑작스럽게 놀랐을 때처럼 의식적으로 통제할 여유도 없이 튀어나오는 내 말, 표정, 몸짓들. 그 순간들이야말로 내가 얼마나 정제된 사람인지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의 나는 놀라거나 당황하면 쉽게 날카로워졌고, 곧장 변명으로 나를 숨기곤 했다. “그땐 놀라서 그랬어,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감정은 여전히 출렁이지만, 반응은 예전보다 부드럽고 조용하다. 그 변화는 의식의 반복된 훈련에서 비롯되었고, 나는 그 과정을 통해 내 무의식의 결마저 서서히 바꾸고 있음을 느낀다.
어느 날, 문득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린, 너 예전보다 많이 성장했구나. 예전 같았으면 화를 냈을 상황이었는데, 지금은 차분하게 흘려 보낼 수 있네. 너가 정말 자랑스러워.”
그 말을 마음 안에서 꺼낸 순간, ‘조심’이라는 단어가 조금 멀어졌다. 나는 조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로 존재하고 있었다. 더는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삶을 돌아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주제가 있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고, 언제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종종 이렇게 자문한다.
“만약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떠난 뒤 남겨질 물건들, 디지털 공간 속 말과 기록들, 나의 선택들. 그것들이 세상에 남았을 때, 나는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진짜 숨기고 싶은 게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이 질문은 나를 다그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격려하기 위한 기준이 되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나는 나에게 당당할 수 있는가. 그 물음 하나만으로도 삶의 방향이 조금씩 정돈되기 시작했다.
조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내 안의 거칠고 날 선 것들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인정하고, 다듬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나는 여전히 자주 조심한다. 화가 날 때도 있고,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괜찮아,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 감정을 어떻게 흘려보낼지는 네가 선택할 수 있어.
잘 흘려보내자, 아이린. 고마워. 너가 정말 자랑스러워.”
오늘도 나는 그렇게 나를 다듬는다. 조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 길은 아마 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조금 더 정제된 나로 살아가는 하루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https://medium.com/@irenekim1b/becoming-someone-who-doesnt-need-to-be-cautious-709d56e216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