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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영 변호사 Apr 22. 2024

'법이 원래 잘 맞았다'는 착각

원래 잘 맞았던 게 아니라, 잘 맞을 수밖에 없게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피고인들을 변론하는 변호사로 살다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과다한 업무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순간부터는 재판하는 기계처럼 살았고

12년의 국선전담변호사를 마친 후에는 고장 난 기계로 살다가 기계가 멈추는 현상을 경험했다.

이제는 '활기찬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버거울 정도로 많은 수천 건의 사건을 변론하면서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그래도 필자는 '법이 나랑 잘 맞는구나. 변호사가 되길 잘했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법학 공부가 잘 맞았냐"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법이 저랑 잘 맞았던 것 같다"

라고 말해왔다.


그렇게 필자는 최근까지

 '법이 원래 잘 맞아서 변호사를 업으로 살고 있다.

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뜬금없이 1996년 법학과 입학당시의 필자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은 법학교과서도 법전도 대부분 한글로 바뀌었지만,

1996년도의 법학교과서와 법전은 한자가 많이 섞여 있었다.


1996년 법학과 입학 당시의 필자는,

한글과 한자가 섞여 있는 법학교과서를 보면서

우선 한자를 한글로 번역하고,

한글로 되어 있는 그 문장을 하나하나 나눠 읽어야 비로소 법학교과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법학교과서를 읽으면서,

'한글도 이해 할 수 없는 글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또 생각해 보면, 법대 4년 동안

강의 시간에 교수님 말씀을 듣고 바로 이해해 본 적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강의 시간에는 강의내용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상태로 그냥 앉아 있다가,

강의가 끝나고 혼자 법학교과서의 문장을 나눠서 읽으면서 그 의미를 이해했었다.

(그래도 필자가 강의 시간에 교수님 말씀을 듣고 바로 이해한 내용이 있다.

헌법 시간이었는데, 교수님께서 '인간의 존엄권'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서,

"인간은 항상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수단이 되면 인간의 존엄권을 침해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신 내용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 깊이 새겨져 있다.)



그렇게 필자의 20대 초반의 모습을 기억해 내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법이 원래 필자와 잘 맞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이 너무나 어려웠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법이 원래부터 잘 맞았다"라고 착각하게 된 이유는,

12년 동안 수 천 건의 형사사건을 변론하며
 수만 번의 재판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변론을 무한 반복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잘 맞을 수밖에 없도록 무한 반복한 것이

'원래 잘 맞았다'는 착각을 하게 한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법이 필자와 잘 맞았다'라고 착각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도 있었다.


법대에 진학했지만 공무원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교 3학년 때 행정고시를 준비했는데

법학을 공부하던 필자에게 행정학은 공부하기 어려운 과목이었다.

'~법'이 아닌, '~학'으로 끝나는 과목들은 머리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법'이 아닌 '~학'으로 끝나는 과목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필자가 '~법'과 잘 맞았고, '~학'과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필자는 어떤 일이든지 처음에는 이해를 잘 못하고, 무수히 반복해야 이해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필자는 행정고시 준비를 중단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게 되었다.



또, 필자는 억울하면 화가 나고, 화가 나면 힘이 나는 사람이다.

(꼬마자동차 붕붕은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았는데

필자는 억울하면 힘이 났다.)


그래서 억울한 사건을 맡으면 화가 나면서 그 억울함을 해결해 주려 노력했다.

억울하면 화가 나는 그 성격이,

필자가 국선변호인으로 선정되었던 수천 건의 사건을 억울함 없이 변론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사유로 필자는 최근까지

'법학이 나랑 잘 맞는구나. 변호사를 직업으로 선택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 맞는 것 같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1996년도에 법대에 입학한 필자는 최근까지 그때의 기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법학이 필지와 원래부터 잘 맞았다'는 건 또 하나의 착각이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헌법 시간에 배운 ‘정의’,‘인간의 존엄권’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뛰었던 것 같다.

그 가슴 뛰는 느낌이 법학을 직업으로 갖게 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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