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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영 변호사 Apr 23. 2024

그 이야기.

2018년 여름이었다.


어머니께서 사고를 당해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던 그 해의 이야기다.

그 해에 필자는 마음이 아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가슴과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온 몸으로 아팠던 그 시간들을 가족들이 함께 버텨냈고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살아나셨다.

그런데, 그 시간들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지 아직까지도 필자를 괴롭히는 것 같다.

이제 온 마음으로 아팠던 그 시간과 이별하고자 그 이야기를 한다.



사고를 당한 어머니를 수술하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수술했는데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봉합을 하지 못하고 거즈 2장을 넣어두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피가 멈추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피가 멈추어야 어머니가 살아날 가능성이 있었고, 피가 멈추는 건 하늘에 달려 있었다.

어머니는 사고 후 수술을 받고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셨다.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어머니는, 얼굴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고 몸은 통나무를 이어놓은 것 같았다.

필자는 사고가 난 날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니의 침대에 갔지만 처음에는 누워계신 분이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풍선처럼 부어있는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고서야 누워계신 분이 어머니임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엉엉 소리를 내며 우셨다. 나이 많은 남자 어른이 엉엉 소리를 내면서 우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슬프게 우시는 모습은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본 이후로 처음이었다.


사고 경위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에 가서 블랙박스 영상과 CCTV를 확인했다.

아버지와 동생은 몇 번을 까무러쳐서 영상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필자는 딸 셋인 집에 첫째 딸이었고, 또 형사전문 변호사였다. 업무상 이미 사고 영상은 수도 없이 봐왔던 터였다. 우리 가족 중에 사고 영상을 정확히 볼 수 있는 사람은 필자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신 차리고 사고 영상을 보자. 어머니가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알아야 한다. 나 밖에 영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필자는 사고 경위를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서 사고영상을 반복해서 시청했다.

그런데, 그 영상이 필자에게 트라우마처럼 남게 되었다.


사고 시간은 한 여름의 오전 9시 30분 정도였다.

햇빛이 쨍쨍하고 시야를 가리는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사고가 난 횡단보도는 사각형의 4선과 대각선까지 모두 횡단보도인 대각선 횡단보도였다.

어머니는 횡단보도 한쪽에서 보행신호가 녹색불로 바뀔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다.

빨간불이 녹색불로 바뀌고 어머니는 횡단보도를 건너셨다.


가해 차량은 어머니가 건너는 횡단보도 반대편에서 어머니가 건너는 횡단보도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차량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음에도 횡단보도를 아주 천천히 침범하여 통과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횡단보도를 중앙선 근처까지 건너고 계셨는데,

가해차량은 천천히 어머니가 건너는 횡단보도까지 와서는 어머니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진행해서 가해차량의 오른쪽 앞범퍼로 어머니를 충돌했고,

어머니의 몸은 마치 인형처럼 순식간에 차량 밑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리고 가해차량은 어머니 몸 위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사고당일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어머니라 믿을 수 없는 어머니의 모습을 확인하고,

블랙박스와 CCTV로 사고 경위까지 확인한 후 차를 운전해서 밤이 되어서야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놀랍게도 난 침착함을 유지했고,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내 방 문을 닫는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께서 입원하시고 3일째 되던 날 교수님께서 피가 멈췄다고 말씀해 주셨다.

너무나 다행이었다.

피가 멈춰서 이제 어머니께서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게 중환자실로 들어갔는데,

어머니께서는 산소호흡기를 빼고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엄마가 너무 아파. 아무래도 엄마는 힘들 것 같아. 집에 가서 엄마 옷을 다 태워. 죽은 다음에 태우면 안 좋다고 하더라."

나중에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이지만,

어머니는 차량 밑에 깔려 있는 순간에도 "숨만 쉬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숨을 쉬려고 노력했다고 하셨다. 사고가 난 날 119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는 순간에도 소방대원이 보호자인 아버지께 전화를 하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그 사람 내가 많이 다쳤다고 하면 오다가 사고 날 수도 있으니 많이 다쳤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면서 차량에 깔려 온 몸이 부서진 채로 응급실로 이동하는 순간에도 아버지 걱정을 먼저 하셨던 어머니셨다.

그렇게 강하신 어머니께서 생을 포기하는 말씀을 하셨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필자는 융통성도 없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좋고 싫음이 얼굴에 그대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때 필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완벽하게 연기를 했다.

어머니께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씀드려야 했다. 어머니께서는 일하는 필자를 대신해 손녀인 필자의 딸을 키워주셨다. 필자의 딸은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가장 좋아한다.

필자는 아무런 동요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왜 죽어. 살아서 우리 00 맛있는 음식도 해줘야지.
엄마는 살아날 거야. 그런 얘기하지 마."

아무렇지 않게 말은 했지만, 중환자실을 나오자 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필자가 무너지면 안되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꾹 참았다.


필자는 단순하게 피가 멈추면 어머니께서 살아날 수 있으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까지 의식이 없던 어머니는 피가 멈추자 의식이 돌아왔고,

의식이 돌아오자 온몸이 부러진 아픔을 느끼셔서 생을 포기하시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의식이 돌아온 어머니는 전신 마취를 하며 계속적으로 수술을 받으셔야 했다.

수술하기 전에 병원에서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야 하기에 병원에서 필자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께서 입원하신 병원의 전화번호는 031로 시작했다.


이미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은 상태였는데,

핸드폰에서 031로 시작되는 번호가 뜨면 또다시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어머니 셨기에 병원에서 무슨 말을 들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031로 시작되는 번호를 볼 때마다 또다시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사고 영상을 반복 시청한 트라우마는 운전할 때마다

차디찬 도로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했고,

누군가가 내 차 밑에 깔리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생기게 했다.


하지만, 필자의 직업상 구치소와 법원을 오가야 하기 때문에 운전을 해야 했고,

필자의 집인 서울에서 어머니께서 입원해 계시는 경기도까지 가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타야 했기에 운전을 해야 했다.

운전을 할 때마다 사고 영상이 자꾸 떠올랐지만 어쩔 수 없이 필자는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필자에게 심장이 뛰는 증상이 생긴 것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는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심장에 문제가 없었고, 아마도 이때의 충격이 두근거리는 증상으로 나타났던 것 같다.


그렇게 사고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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