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모험 하나로 얻는 연결의 감각
그놈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연수 장소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5F Roof Top"
이라는 낭만적인 단어가 갑자기 빛을 내며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쉬는 시간에 여길 가보자고 마음먹었다.
기다리던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잽싸게 4층에서 5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에 하늘색과 진분홍 빈백이 나란히 놓여있고 라운지 같은 공간이 옆에 있었다.
'역시 이런 곳이 숨어있었군!'
테라스로 향하는 문이 있었다. 다행이 라운지에는 아무도 없고 테라스로 나가는 문도 열렸다.
남산 바로 아래 있는 곳이라 역시 전망이 끝내줬다. 나는 인스타각 이라고 생각하다가..이런걸 올려 뭐해..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작게 꾸며진 정원과 완강기, 바로 옆 건물의 기품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한 스테인글라스 창문과 십자가 탑을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가져왔으면 남산 타워와 어울어진 해질녘 이런 저런 풍경들을 찍었을텐데 아쉬웠다.
완강기? 갑자기 조금 전 내가 옥상 테라스 밖으로 나왔던 문이 살짝 닫히는 소리가 났다. 불길한 예감에 서둘러 문고리를 당겼으나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 밖으로 '안에서는 열리나 밖에서는 열리지 않으니 조심하시오'라는 문구가 개미눈꼽만큼만한 크기로 써져 있는 것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설상가상으로 라운지의 접이식 통유리창 문도 모두 굳게 닫혀있었고, 내 몸이나 심지어 내 소리가 빠져나갈 창문도 없었다.
문 옆에 있는 지문 인식기는 아무리 인식해봐도 '인식되지 않습니다'라는 말만 나왔다.
나는 갇혔다.
일단 기척이라도 알리려는 마음에 창문과 벽을 세게 두들겼지만 팔만 아프고 소용이 없었다. 창문을 통해 안으로 보이는 빈백 두 개가 야속했다. 나오지 말고 그냥 저기 누웠어야 하는 건데....옥상데크 나무판이 들뜬 곳이 있어 발도 굴러보았다.
소용없었다.
나는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다행이 옥상 화단에 물주는 용인지 수도꼭지가 있었다. 물이 있으니 최소한 생존은 가능하겠다 싶었다. 다행이 후드티도 입고 있어 밤에 추워도 견딜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장실 가고 싶은건 화단이 있으니 급한대로 거기 해결하자는 생각까지 갔다.
'나 이러다 옥상 트라우마 생기는거 아냐?'
'여기 있다가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하지'
'그놈의 호기심이 문제야ㅠㅠ'
'시간은 상대적이라는데 이럴 때 시간은 영겁이군'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데...'
별의 별 생각 끝에 몇 가지 대안을 생각을 했다.
아직 라운지에 불이 켜져있는 상태니 경비아저씨가 퇴근 전 분명히 불을 끄러 5층에 올라올 것이다. 그 때 유리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른다.
완강기를 타고 내려가 본다.
아니면 완강기에 달려있는 웨이트를 던져서 창문을 깨고 최대한 빨리 빠져나간다.
첫 번째를 하며 기다리자니 속이터졌다. 아까는 몰랐는데 유리창을 두드리느라 멍든 손바닥을 보니 더 속상했다. 이러다 경비아저씨가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기라도 하면 모든게 물거품이 된다.
창문을 부수자니 기물파손으로 배상할 돈이 아까웠다. 창 두께를 보니 강화유리라 두께가 제법 있어 깨는 것도 쉽지 않아보였다.
아까봤던 완강기를 열어 꺼내보았다. 완강기 속에서 생산년도가 2014년임을 알려 주는 낡은 종이조각이 나왔다. 생산된지 10년이 넘은 녹슨 완강기에 내 몸을 걸고 5층 높이를 내려가다 무슨 사고라도 나면 더 큰일 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 길이 12m 짜리 완강기가 5층 높이를 완전히 커버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과 3층 사이 애매한 높이에서 줄 하나에 매달려 버둥대고 있을 내 모습을 생각하니 그냥 몸이라도 보존하고 곱게 기다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담배라도 피러나올지 모르니 희망을 갖고 기다려보자 했다.
해도 어느새 점점 지고 있었는데 내려다보이는 옆 건물 교회 주차장에 검은 머리통이 보였다.
'저기요'
소리를 질렀지만 검은 머리통은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골목으로 퍼머 머리가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번엔 손을 메아리 모으듯 간절히 모으고
'살려주세요'
라고 아까보다 훨씬 크고 간절하게 소리를 질렀다.
퍼머머리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데시벨을 더 올려
'119 불러주세요. 옥상에 갇혔어요. 아니면 경비실에 전화라도 해주세요' 다행이 '네'라는 반응이 왔다.
이제야 살았다 싶었다. 5분이 채 안되어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엘리베이터 숫자가 B2에서 B1로 변하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카드키를 든 키 큰 반가운 분이 나타났다.
결국 연수 한 시간을 날려먹었지만 그래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간식을 먹으며 마저 남은 연수를 들었다.
나의 생존 본능에 신호등이 켜졌던 이 시간을 생각한다.
인간은 각종 악조건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있다. 오늘 나의 무기는 놀랍게도 내가 가진 목소리였다는 것. 그리고 고맙게도 한 행인이 내 목소리를 들어줬고, 짧은 시간에 누군가가 옥상으로 올라와서 바로 문을 열어줬다. 타인과의 연결이 오늘 자칫하면 옥상에서 실종될 뻔 했던 나를 위기에서 구해줬다.
생각해보면 너무 다행이다.
만약 혹한기에 외투도 없이 바람쐬러 나갔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오늘은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그리고 만약 연수 장소가 서울이 아니라 산 속 같이 아주 외딴 곳이어서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면...5층이 아니라 고층 빌딩 옥상이어서 나의 목소리가 지상까지 들리지 못했다면...
유발하라리는 AI시대에 인간성을 유지하고자 하루 2시간씩 의도적으로 '명상'을 하고, 지식을 마구잡이로 흡수하는 대신 '성찰'을 한다고 한다.
오늘날의 소통 수단과 단절된 채 어쿠스틱하게 옥상에서 보낸 1시간에 나는 '옥상낭만'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 그리고 이 사건의 의미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성찰해봐야겠다.
'작은 모험하나가 연결의 감각을 얼마나 높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 <아티스트웨이>, 줄리아 캐머런
Ps. 아들한테 이런일을 겪으면 어떻게 할거냐고 물어봤다. 아들은 완강기를 타고 4층 창문까지만 내려갈거란다. 만약 4층에서 강의를 듣고 있던 수강생들이 창문 밖으로 이런 나의 모습을 봤다면 어땠을지 상상에 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