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믿어서 안 보는 게 아니고 보면 믿을 까봐 못 본다.
잘못 들었나? 내 사주가 방석사주라고요?
"결혼하면 남편한테 방석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남편을 딱 받쳐주는 사람이라는 거지. 그러니 시어머니가 좋아할 밖에."
“아~”
역술가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림의 방석이 역술가의 펜이 닿을 때마다 점점 도톰해져 갔다. 나같이.
하필이면 깔고 앉는 방석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땐 그런 비판능력이 없던 시절이었다. 비판은커녕 갑자기 빛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럼 결혼하면 내조해요? “
사실 그 당시 내 꿈은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 배웅하고 집안을 깨끗하고 예쁘게 돌보며 사는 거였다. 마당에 화초도 키우고, 저녁준비하고. 말 그대로 행복한 주부이자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꿈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남편을 받쳐주는 아내 사주라니, 방석이고 뭐고 내게는 빛이 보였다.
그런데..
“아니요. 일은 계속해요. 계속하는 게 좋아요. 희진 씨 사주에는 일이 많아요.”
“그만두고 살림하는 거 아니고요?? 지금 일하는 거 계속해요?”
“지금 하는 일 그만둬도 일은 계속할 거예요. 그리고 그게 희진 씨한테도 좋아요.”
뭐야. 내조가 아니라 경제적 방석이었어?
아.. 이번 생은 망했구나.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만나길래 내가 경제적 서포트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난 평생 일할 팔자구나. 살림하며 알콩달콩 사는 건 내 팔자가 아닌가 보다 하며 좌절했다. 너무 실망해서 그 뒷말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흔한 맞벌이일 뿐인데 그 당시엔 충격이었다.)
아! 기억나는 게 한 개 더 있기는 하다. 내 사주에 아들이 하나 있단다.
남편이 맥주를 뿜었다. 급하게 휴지로 떨어진 맥주를 닦으며
“뭐야, 아들 하나! 그 사람 진짜 정확하네~ 그럼 내가 그 방석 위 남자야? “
눈치 없이 웃는 남편을 살짝 흘겨봤다. 좋냐?
대강 바닥에 떨어진 맥주를 닦아낸 남편은
“자, 현모양처. 이리 와봐."
하더니 자기 무릎에 나를 끌어 앉혔다.
"왜 이래~? 징그럽게"
"자, 이제 됐지? 자기 내 방석 하지 말고 이렇게 이불 할래? 이제 내가 방석 할게. 어때, 내가 더 폭신폭신하지 않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러자.
누가 하면 어때. 어차피 부부는 평생 같이 살아야 하는데 번갈아 방석 해주면 되지.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 사람 만나게 하려고 결혼 늦게 하라고 한 거면 그건 인정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네.
그날 이후 나는 사주를 보지 않는다.
안 믿어서 안 보는 게 아니고 보면 믿을 까봐 못 본다.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다. 어쩌면 자아가 강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깨달은 것도 내가 깨달은 양 잘 받아들이고 책에서도 영감을 잘 받는 편이다. 대신 그래서 사주처럼 나를 결정짓는 말에도 금세 영향을 받아 버린다.
20년도 더 지난 일인데 이렇게나 기억이 또렷한 이유는 그만큼 내 사주 경험이 특이해서이기도 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나의 성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거기에 살면서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그때의 역술가 말이 떠올라 잊으래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기도 했다.
'일은 계속해요. 희진 씨 사주에는 일이 많아요.'
망할 놈의 일할 팔자 같으니라고.
그래서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사주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역술가 말처럼 일을 하고 있을까?
지금의 나는..
일을 그만두고 바쁜 주부 생활을 하고 있다.
어? 그럼 역술가의 말이 틀린 건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집에서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던 어느 날.
아빠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들렸다. 아빠의 투병생활이 시작되었고 그걸 계기로 나는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지금 나는 다시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것도 내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IT일을 시작해 배우고 있다.
진짜 팔자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답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요즘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요즘 나는 내 일할 팔자가 참 좋다. 더 이상 팔자 원망을 하지 않고 행복하게 일을 하는 중이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변한다. 정해진 팔자가 있든 없든 설사 있더라도
사람이 달라지면 같은 팔자라도 다르게 다가오기 마련인 것 같다.
나는 이제 내 일할 팔자가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