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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사랑 Mar 20. 2024

덤으로 받은 삶

아이를 등원시키고 세탁소에 들러 겨울 내내 고생한 패딩들을 맡겼다. 

집에 돌아오는 길 어디선가 향긋한 커피 향이 마음을 동하게 한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샀다.


3월 중순이 지나가는데도 날씨는 아직 손이 시리다. 

따뜻한 커피로 두 손을 녹이며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가는데 단지 내 공원이 보였다.

오늘은 참 마음이 동하는 날인가 보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곳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정겨워 보인다.

내친김에 한 바뀌 돌아본다. 차가운 이른 봄의 공기가 마음까지 깨끗하게 씻어내는 기분이다.


따뜻한 커피를 조금씩 흘려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시간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우리 집 아이가 매일 이용하는 놀이터도 보이고 그 옆에 늘 있었지만 무심코 보아 넘겼던 나무들도 보인다. 강아지 산책을 나온 커플도 있고 나무 밑 흙더미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는 중년여성도 보인다. 쑥을 캐시나? 알 수 없다.  


'맞아. 여기가 이런 곳이었지, '

'여기 나무에도 이제 꽃망울이 맺혔구나.' 

'오랜만에 하늘이 참 맑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갑자기 이 모든 게 감사함으로 다가와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길을 건강하게 걸을 수 있음에 감사했고

손안에 따뜻한 커피 한잔을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음에 감사했다.

내 옆에 아이와 남편이 함께 있음에 감사했고

우리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집이 있음에 감사했다.

돌아갈 곳이 있음에 감사했고

이렇게 산책할 수 있는 곳이 있음에 감사했다.

이 모든 걸 만났음에 감사했고 

다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감사했다.


그렇구나. 나 이렇게 잘 살고 있구나. 난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주책맞게 눈에 눈물이 맺혀왔다.


한 때 항암치료를 받으며 머리털 하나, 눈썹하나 남아있지 않던 나를 보며, 미래라는 걸 꿈꾸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면역력이 떨어져 집에서 격리생활을 하던 시절. 너무 갑갑해서 혼자 가발에 모자를 쓰고 마스크까지 끼고 나갔다가 몇 걸음 못 가고 숨이 차서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할까? 치료는 이게 끝이다. 재발하면 난 더 이상의 치료는 받지 않을 테다. 그렇게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내가 이렇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구나. 

감사했다. 이 모든 걸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다시 삶을 꿈꿀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했다.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며 오늘따라 눈부신 하늘이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내 삶은 어쩌면 덤으로 얻은 삶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딘가 쓰실 곳이 있어 덤으로 주신 삶일지도 모른다.

덤으로 얻은 삶에서 이처럼 행복함을 느낄 수 있으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 것인가.


잠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이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그나마 그 오늘이 내가 받은 덤의 삶이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가끔 나와서 걸어야겠다. 

내 주변에 이렇게나 많은 감사한 일들을 잊지 않고 다시 떠올리기 위해서, 그리고 기억하기 위해서 가끔 걸으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그런 시간들을 가지며 살아야겠다 다짐해본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나의 오늘을 감사하며 덤으로 받은 삶을 더 알차고 행복하게 채워나가고 있다.

오늘도 열심히 글을 쓰고 일을 하면서 말이다.


바로 오늘이 내 인생 가장 행복한 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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