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
“아니 패스를 누가 저따구로 주냐...”
“돈을 받고 축구하면 좀 잘해라!!!”
나는 다 먹은 맥주캔을 소파 옆에 던지고,
화면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TV 속, 카디프 시티는 또 다시 기회를 날리고 있었다.
하프라인 근처에서 볼을 잡은 미드필더는
기껏 열심히 올라간 윙어를 무시하고,
혼자 돌다가 백패스를 해버렸다.
그걸 상대가 낚아채고 역습.
실점.
“이걸 또 먹히네... 하아.”
화면 속 중계진이 조심스레 말을 잇는다.
“카디프 수비가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건 실수죠.”
“실수? 저건 그냥 멍청한 거야. 멍청해서 멍청한 짓을 한 거라고!!”
나는 리모컨으로 소리를 높였다.
혹시라도 이놈들이 내 말을 듣게 될까 봐.
“내가 감독해도 저것보단 낫겠다. 진짜로.”
그때였다.
“그럼 한번 해보시죠.”
“그래, 내가 하면... 뭐?”
내 말에 반응한 목소리.
분명 내 방엔 나 혼자였다.
그런데 지금 내 옆자리에, 누가 있었다.
검은 수트, 흰 장갑, 그리고 정리된 단발머리.
지나치게 말끔하고 조용한 사람.
그는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카디프 시티 감독직입니다. 정식 계약서는 여기 있고요.”
나는 멍하게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후특례자 감독 계약서>
대상: 이태연 (만 32세)
구단: 카디프 시티 (EPL 챔피언십)
계약 조건: 시즌 목표 미달성 시 즉시 사망
“...미친 거 아냐?”
검은 수트의 남자는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탁.
공중에 홀로 떠오른 화면.
거기엔 낯익은 사이트 창이 떠 있었다.
[국내 축구 갤러리]
“카디프 미친다 진짜;; 저거 그냥 백수가 감독해도 더 잘하겠다.”
“난 진짜 전술 짤 줄 암.”
“이게 팀이냐? 아오 진짜 패스 좀 제대로 해라.”
ID:taeyeonball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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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이디잖아?”
“네. 저희는 매주 생사부에서 축구 관련 답답함 지수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게 말이 돼?”
“당신 건이 워낙 강력해서요.
축구 관련 빡침 수치가 기준치를 초과했습니다.
심지어 주작 없이요.”
남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래서 저희가 먼저 제안드리는 겁니다.
실제로 한번 해보시라고.”
남자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말만 하지 말고, 직접 해보세요.
감독이 정말 어려운 일인지, 아니면...
당신 말대로 쉬운 건지.”
“...만약 내가 목표를 못 채우면?”
“그땐 사망 처리됩니다.
아주 깔끔하게요.”
그 말이 끝나자,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몸이 허공으로 붕 뜨는 느낌.
“잠깐... 야, 아직 사인도 안 했는데!!!”
나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어두운 공간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낯선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엔 축구 전술 보드, 벽에는 푸른 새 엠블럼이 그려진 깃발.
그리고 내 앞에는, 이상하게 낯설고 또렷한 여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검은 수트에, 단발머리.
무표정한 얼굴로 태블릿 같은 걸 만지작거리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오, 일찍 깨어나셨네요.
카디프 시티 새 감독, 이태연씨 맞으시죠?”
“...너 또 뭐야.”
“저는 루시입니다.
저승사자 협회 소속, 이태연 감독님의 현장 가이드죠.
감독님께만 보이는 형태로 설정되어 있고요.”
“그러니까... 지금 여긴 어디고, 너는 대체...”
“카디프 시티 감독실입니다.
오늘 오전 9시 자로 부임되셨고요.
현지 시간 12시에는 기자회견이 있습니다.”
“잠깐, 기자회견!?”
“네. 현실 세계에서는 ‘한국인 축구 분석가 출신의 젊은 감독’이라는
보도자료가 나갔어요. 믿을 사람도 없겠지만, 요즘 세상이 워낙 뭐...”
나는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얼굴은 분명 사람인데, 그 눈동자는 어딘가 멀고 깊었다.
“질문 있으시면 지금 하세요.
저도 초반엔 지원을 좀 더 해드리니까요.”
“...축구는, 너 잘 알아?‘
”전술, 포메이션, 선수 데이터.
FM 2023버전 기준으로 대부분 알고 있어요.“
”...그걸로 괜찮을까?’
루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죽기 싫으시잖아요.
괜찮을 리 없죠. 하지만, 방법은 있으니까요.”
루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감독님, 나가보시죠. 기자분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어였다. 그리고 너무 현실 같았다.
루시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진짜 시작이에요.
일단 감독실 밖부터 나가보시죠. 이태연씨.”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엔 식은땀이 고여 있었고, 다리는 약간 떨렸다.
‘진짜야... 이건 진짜 현실이야.’
문을 열자, 복도 너머로 푸른색과 회색으로 꾸며진
구단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벽면엔 'CARDIFF CITY FOOTBALL CLUB'이라 적힌
문장이 큼직하게 박혀 있었다.
내가 TV로만 보던 바로 그곳.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 중심에 있었다.
“아, 감독님. 어서 오세요.”
구단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부랴부랴 다가왔다.
정장 차림에 축구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이쪽으로 가시면 기자회견장입니다.
생각보다 반응이 뜨거워서, 미디어룸이 꽉 찼어요.”
나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끄덕였다.
그 옆에 루시가 덧붙였다.
“현재 기자단 25명, 그중 한국 기자 2명.
인터뷰 예상 질문은 ‘당신은 누구냐’, ‘어떤 축구를 할 거냐’,
‘왜 하필 카디프냐.’”
“...이게 말이 되냐고.”
“당신이 그렇게 말해놓고, 이제 와서 도망가면 좀 그렇잖아요.
‘백수가 감독해도 낫겠다’면서요.”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직원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
대부분이 나를 힐끔 보거나, 속닥속닥 뭔가를 주고 받았다.
그 중 한 명은 대놓고 말했다.
“한국에서 왔다던데... 분석가였다며?”
“나이도 서른 둘이라던데? 너무 어린 거 아냐?”
루시는 옆에서 태연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당신을 의심하는 시선은 오늘이 가장 약할 겁니다.”
“왜?”
“경기 시작되면,
당신을 욕하는 소리가 더 커질 테니까요.”
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긴 복도가 끝나고,
기자들의 플래시가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기자회견장이 가까워질수록, 내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문 앞에서 결국 멈춰 서고 말았다.
“...잠깐만.”
“왜요?”
“나... 영어 못해.”
루시가 나를 바라봤다.
“말 자하던 백수가 갑자기 겁나요?”
“아니, 진짜로. 영어 못 해.
‘패스’랑 ‘골’은 알아도 유창한 영어는 못한다고.”
“...그래서 지금, 안 들어가겠다고?”
나는 진지했다.
“거기 다 외국 기자들이잖아.
내가 뭔 말 하면 ‘KIMCHI~'이러면서 웃을 거 아니야.
망신 당하느니 차라리 죽-아, 아니지, 진짜 죽지...”
루시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태블릿을 몇 번 툭툭 눌렀다.
“그럴 줄 알고 설정해놨어요.”
“뭘?”
“감독님은 그냥 한국어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저승 계약에 포함된 ‘자동 동시통역 기능’이 활성화돼 있어요.”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말은 한국어로 해도, 듣는 사람에겐 매끄러운 영어로 들립니다.”
“...뭐?!”
“심지어 억양도 자연스럽게 바뀌어요.
영국식입니다. 발음 되게 고급지게 나갈 거에요.”
“그런 게... 진짜 된다고?”
“죽고 사는 계약을 했잖아요.
통역 하나 못 만들어주면 저희도 욕먹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제 진짜 못 도망친다.’
루시는 문 손잡이에 손을 얹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준비되셨죠?”
문이 열렸다.
플래시가 터졌다.
나는 이제 ‘백수’가 아닌 ‘감독’이었다.
“오 마이 갓, 저 사람이야?”
“진짜 동양인이네.”
“한국에서 분석가였다는데...”
영어, 웨일스어, 그리고 익숙한 말들까지
속삭임이 뒤섞여서 공기를 진동시켰다.
나는 멍하니 그 소리를 들으며
마치 무대 위에 올라선 연극 배우처럼,
자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자회견장의 중앙.
카디프 시티 로고가 박힌 배경 앞.
파란색 테이블에 마이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등 뒤에서 루시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냥, 당신답게 말하세요.”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마이크 앞으로 입을 가져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카디프 시디의 새 감독, 이태연입니다.”
기자들의 눈이 커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곧, 손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BBC 스포츠, 제임스 크로포드입니다.
감독님은 축구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셨습니까?”
나는 속으로 ‘아씨, 저걸 어떻게 대답하지...’
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놀랍게도 말이 튀어나왔다.
“제가 이 자리에 온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금까지, TV 앞에서 너무 많은 경기를 보면서
내가 더 잘하겠다고 말해왔거든요.”
순간, 기자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 팀이 어떤 상황인지, 저도 잘 알고 잇어요.
그리고 제가 누군지도... 아직은, 저 자신조차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손에 주먹을 꽉 쥐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기회가 왔고!
도망치지 않기로 했습니다.”
플래시가 다시 터졌다.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한두 번 들렸다.
기자들은 더 많은 질문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제 진짜 감독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루시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영국식 억양, 잘 어울리네요.
이 정도면 첫 인상은 합격이에요. 감독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망했다.’
플래시가 몇 번 더 터지고, 두세 개의 무난한 질문이 오갔다.
나는 무사히 대답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이었다.
한 기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입꼬리는 비꼬듯 올라가 있었다.
“스카이 스포츠, 리처드 스노우입니다.
감독님께선 전술에 대해 말씀이 없으시네요.
혹시, 애초에 준비된 철학이나 전술이 있으신가요?”
그 질문은 ‘축구 한 번 해봤어?’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하지만 마이크는 이미 내 앞에 있었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루시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냥 해보세요. 생각나는 대로,
당신이 늘 말해왔던 그 말투로.”
나는 천천히 마이크를 들었다.
“...전술이어요?”
“네, 팀을 어떻게 이끌 건지.
4-4-2인가요? 3백? 수비 라인 컨트롤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카디프는 지금까지 4-2-3-1을 썼죠.
측면을 넓게 쓰고, 미드필더가 빌드업을 주도하지만
실제로는, 볼 간수가 너무 느리고, 수비 전환이 늦어요.
윙어들이 고립되고, 패턴이 단순하죠.”
기자들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래서 저는, 초반엔 3-5-2로 갑니다.
수비라인은 내려서고, 역습을 염두에 둔 구조로.
대신, 중앙 숫자를 늘려서 볼 소유를 확보할 겁니다.
공은 지켜야 찬스가 나와요.”
리처드 기자의 펜이 멈췄다.
주변의 속삭임이 다시 커졌고, 누군가 낮게 말했다.
“그거... 맞는 말이긴 하지.”
나는마이크에서 입을 뗐다.
“정답은 아니에요.
근데 전 그렇게 시작할 겁니다.
죽기 살기로요.”
그 순간, 기자회견장의 공기가 아주 미묘하게 바뀌었다.
루시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살짝 멋있었어요.
정말 살기 위해 말하신 거지만요.”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망하지 않은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