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나는 점차 이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시장으로 나가 일을 하고,
낮에는 짐을 나르고, 저녁이면 밥 한 그릇에 만족한다.
예전의 나였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돈이 필요하면 죽이고, 뺏고,
그게 전부였고, 그것이 효율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조선에 있다.
내가 알고 있던 모든 법칙이 통하지 않는 곳.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곳의 공기, 이곳의 사람들, 그리고...
그녀의 함께한 짧은 순간들이
내 안의 뭔가를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다.
**
나는 시장으로 향했다.
어제 처음으로 손에 쥔 몇 냥.
그 맛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일을 하러 간다.
“어이! 또 왔네?”
어제 나를 고용했던 사내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또 일하러 왔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웃으며 다가온 저 손을 꺾었겠지.
죽이거나, 납치하거나.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짧은 사이지만, 나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늘의 일도 뻔했다.
짐 나르고, 옮기고, 들고...
생각은 필요 없었다. 몸만 있으면 됐다.
“크... 역시 내 안목은 훌륭하구만.
일을 너무 잘해!!”
“감사합니다...”
누군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한 건 오랜만이다.
늘 “넌 죽어야 돼.” “넌 쓸모없는 존재야.”
그런 말만 입에 달고 살았던 내가-
이제는 감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어이! 오늘도 고생했는데,
주막가서 막걸리 한잔 어때?”
사내가 막걸리 한잔 하자며 말을 건넸다.
누군가와 함께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다.
“네! 좋아요... 근데 저 돈이 없는데...”
나는 항상 일을 하고 받은게 따듯한 밥 한 끼였다.
돈보다 중요한 건, 굶지 않는 거였다.
그때 사내가 내 어깨를 툭쳤다.
“내가 살게! 따라와!”
전 같았으면 시비 거는 줄 알고,
그 자리에서 죽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제는 그런 호의가 싫지 않다.
**
나와 사내는 주막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 틈은 아직 어색했다.
사내는 막걸리와 김치전을 시키며
능숙하게 주모를 불렀다.
나는 그 모습을 낯설게 바라봤다.
김치전과 막걸리가 나왔다.
사내는 막걸리잔을 내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 나는 박춘삼이야.
박자 돌림은 아니고, 그냥 박춘삼. 봄에 태어났다고 삼을 붙였대.”
그는 익숙하게 막걸리를 한모금 들이켰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였었다.
“...김도윤입니다.”
“도윤이? 이름 참 곱다! 보기엔 좀 험악해도 말이지.”
그 말에 괜히 머쓱해져, 나는 술잔을 슬쩍 들었다.
누군가와 이름을 주고받은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사내는 막걸리 한 모금을 넘기며 나를 흘깃 쳐다봤다.
“근데 말이야... 너, 이 마을 사람은 아니지?”
잔을 들던 손이 살짝 멈췄다.
역시 눈치 빠른 놈이다.
“내가 이 마을에서 태어나서 쭉 살아왔거든.
근데 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은근히 예리했다.
사내의 말에 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지만,
이내 입이 먼저 반응했다.
“아... 저, 저쪽... 산 너머 쪽 마을에서 왔어요.
일이 좀 있어서 여기까지... 뭐, 그냥 그렇게 됐습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도 어색하단 걸 느꼈다.
하지만 최대한 담담한 척, 술잔을 입에 됐다.
사내는 내 말을 곱씹듯 막걸리를 한 모듬 마셨다.
다행이 딱히 캐묻진 않았다.
“흠... 일이라면... 혹시?”
사내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더니 눈을 반짝였다.
“너 암행어사 그런 거 아니냐?”
나는 그 말을 듣고 술잔을 들던 손을 멈췄다.
“......예?”
“에이, 농담이야, 농담!
근데 워낙 요즘 이상한 놈들이 많아서 말이지.”
춘삼은 김치전을 찢으며 껄껄 웃었다.
나는 억지로 따라 웃었다.
웃음기가 도는 입꼬리 너머로, 식음땀이 등줄기를 타로 흘렀다.
암행어사...
그 말이 귀에 꽂힌 채 머릿속을 맴돌았다.
웃자고 던진 소린 걸 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만약 내가 진짜 그런 놈이었다면 어땠을까.’
‘ 니지, 난 그런 정의로운 부류는 아니야.’
생각이 꼬리를 물고 흘러갔다.
그 순간만큼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라-
진짜 무언가가 되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그건 살인자였던 내가 가져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
그래서 곧 술잔을 비웠다.
그래야 그 감정을, 삼킬 수 있을 것 같아서.
**
술기운이 살짝 오른 몸을 이끌고 주막을 나섰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말걸리 향이 식음 숨결 위로 희미하게 흩어졌다.
걸음은 자연스레 한설의 집 앞으로 향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창호 너머로 은은한 등불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집을 바라봤다.
아무 말도, 아무 소리도 없는 밤이었다.
왜 이 집으로 왔을까.
스스로에게 묻고는, 쓴웃음이 났다.
그녀는 나를 살려줬고, 먹여줬고, 재워줬다.
아무 조건 없이.
그런 사람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일까.
이 집 앞에만 서면, 내가 조금 덜 괴물 같다는 착각이 든다.
하지만 그 착각이 오래가면 안 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문 앞에 조용히 앉았다.
등을 문에 기대고, 무릎 위에 팔을 얹은 채 고개를 떨궜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나직한 혼잣말이었다.
“이상하지... 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말끝이 허골에 흩어졌다.
“처음엔 그냥... 죽이려고 했어.
네가 나를 살렸을 때도, 그 다음에도,
기회만 보면 끝내려고 했지.”
손이 무릎 에서 천천히 오므라들었다.
“근데 왜... 그게 안 되는 걸까.”
조용한 밤, 작은 한숨이 번졌다.
“나 같은 놈이, 네 앞에서 이렇게 앉아 있다는 게
참 우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
문은 조용했고,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없었다.
그게 오히려 도윤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그냥, 여기 있고 싶었어.”
그 말과 함께 도윤은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몰랐다. 문 너머, 아주 가까운 곳에 누군가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살며시 열린 창호 틈 사이, 은은한 등불빛 아래-
한설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숨도 쉬지 않은 채,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모른 채 나란히 있었다.
한설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그녀는 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
이미 조용히 문을 열리고 있었다.
**
다음 날 아침.
어제의 술기운도, 문 앞에서 흘린 말도
깨끗이 지운 듯, 도윤은 다시 시장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무거운 짐을 들고, 땀을 흘리고,
묵묵히 하루를 버텼다.
말 없이, 감정 없이, 그냥 움직였다.
“야, 도윤이! 오늘도 힘 좋네!”
누군가의 농담 섞인 말에 도윤은 짧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뒤로, 이명처럼 번지는 소음이 머리를 울렸다.
심장이 쿵, 하고 한 번 느려졌고,
다리가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다. 참을 수 있다.
그는 버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눈앞이 번쩍하고 하얘졌다.
그리고-
쾅, 하고
도윤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사람들이 놀라 소리쳤고,
누군가 급히 달려왔다.
“야, 도윤이! 정신 차려! 도윤아!”
그의 의식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문든 떠오른건,
어젯밤의 따뜻한 등불 아래 앉아 있던 그 집,
그리고... 한설이었다.
**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천천히 눈을 떴다.
천장, 나무기둥, 은은한 약 냄새-
익숙했다.
여기...
몸을 살짝 움직이자, 이불이 사각이며 따라왔다.
거칠고 단단한 바닥 대신, 푹신한 이불 위였다.
“....한설의 집.”
말이 새어 나왔다.
목이 말라서인지, 목소리는 거의 기척에 가까웠다.
한참을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다,
겨우 몸을 일으켰다.
옆에는 덮어둔 찜질천과 약그릇이 있었다.
가많이 손을 뻗어 그것들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나를,
쓰러진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고,
지금까지 간호했다는 뜻이다.
그 누군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 또 구해주는 거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엔, 혼란과, 죄책감과, 아주 조금의 안도가 섞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 채, 여전히 흐릿한 시야로
방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때-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끼익-
낮고 부드러운 마찰음과 함께
그녀가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약탕기와 수건이 들려 있었고,
그 눈엔 피곤함과 안도감이 함께 어렸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깼어요?”
조심스레 건넨 말에, 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여기... 또, 여기네.”
나의 목소리는 쉰 듯 낮고, 묘하게 쓸쓸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작은 탁자 위에 약탕기를 내려놓고,
그의 이마를 살폈다.
“열이 좀 내렸어요. 그래도 며칠은 쉬어야 해요.”
나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 잘해줘.”
그 물음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여기 있는 게... 그냥, 이유가 돼요.”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침묵 끝에,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니야.”
그 말에 그녀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눈빛은 어디론가 멀리 빠져 있었다.
“사람을 죽였어.
죽이려했고,
죽이고 싶었고...
그게 익숙했어.”
나는 두 손을 무플 위에 꼭 쥐었다.
손등 위로 힘줄이 뻣뻣하게 솟았다.
“근데... 너랑 있으면 이상해.
죽이고 싶은 마음보다... 살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어.”
그는 웃으려 했지만,
그 웃음은 금세 무너졌다.
“이상하지? 그런 내가...
이런 말 하고 있다는 게.”
그 말에 방 안엔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곁에 있던 손길이 조심스레
나의 손에서 떨어졌다.
나는 그 움직임을 느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랬잖아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사람을 죽였다고.”
그 말은 차갑지 않았지만, 선을 그은 듯 또렷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하지도, 번명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조금 혼란스러워요.
내가 당신을 계속 믿어도 되는 건지.”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이 말은 해줄 수 있어요.
몸이 다 나을 때까지, 여기 있어도 돼요.”
그 말 뒤로,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음 발걸음이 점점 멀어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남겨진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