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비녀’
내가 조선에 온지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해가 몇 번이나 떴고 졌는지, 손에 꼽지도 못하겠다.
처음엔 이곳이 낯설기만 했다.
말도, 옷도, 사람도... 전부 다.
그런데 요즘은 익숙해지는 게 더 무섭다.
나는 여전히 이 시대에 속하지 못한 채 살아남고 있다.
살인을 하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은 채.
그녀를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아니, 다시 마주쳐도... 똑같은 눈빛으로 날 봐줄까.’
그녀는 오늘도 약초를 캐러 갔다.
늘 그랬듯, 혼자서.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참을 수가 없었다.
보고싶었다.
마치 중독처럼.
손끝이 근질거릴 정도로.
그래서 나는,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미친 듯이 얼굴이 보고 싶었다.
나는 멀찍이서 그녀를 지켜봤다.
한복 자락을 걷어올리고, 능숙하게 약초를 캐는 손놀림.
햇살에 비친 옆모습이 이상하리만치 평온해 보였다.
그때였다.
저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철컥-
마치 고요한 숲 속에 칼날을 떨어뜨린 듯,
그 정적을 깨는 묵직한 기운이 다가왔다.
“이런 곳에서 혼자라니, 위험하지 않소?”
낯선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붉은 빛 곤룡포와 검은 갓을 쓴 사내가
말을 타고 서 있었다.
그 눈빛은, 사람을 꿰뚫는 듯 날카로웠다.
적산.
이 고을의 사또.
그리고, 아무에게도 쉽게 미소 짓지 않는 권력의 사내.
시장에만 가도 적산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우리 사또님 얼굴 한번만 보면 병도 나아요~”
“적산 대감, 오늘도 다정하게 말씀하시더라고~”
“그 눈빛, 정말 심쿵이라니까~”
...뭐랄까.
현대로 따지면 아이돌급 인기라고 해야 하나?
딱 봐도 정치력도, 외모도, 말발도 다 되는 인간.
딱 하나 빼고-
믿을 수가 없다.
그놈의 웃음 뒤에,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아이돌급 사또가... 한설 앞에 나타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계속 그 모습을 지켜봤다.
웃고 있는 그녀.
그 앞에서 상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적산.
...왜인지, 가슴 어딘가가 뜨끔거렸다.
별것도 아닌데, 계속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마음이 먼저 소란스러웠졌다.
‘뭐야, 이 감정은...’
난감했다.
나답지 않게 괜히 불쾌했고, 괜히 신경이 쓰였다.
딱히 나랑 그녀랑 뭐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자꾸...
그 순간,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머리는 “가지 마”라고 말했는데,
몸은 이미 시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진짜... 나 왜 이러는 거지...”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며,
그 질투 섞인 감정 하나를 숨긴 채.
**
시장에 내려와 보니, 역시나 열심히 사는 사람들 뿐이다.
장사꾼은 목청을 돋우며 물건을 팔고,
아이들은 엿장수 뒤를 쫓아다닌다.
땀에 젖은 저고리를 훔치며 오가는 사람들 속에,
나는 너무 이질적인 존재였다.
나는 그저...
도망치듯 이곳에 와버린,
그리고 돌아갈 곳도 없는...
“에휴, 참.”
괜히 눈길을 돌려봤지만
한설도, 적산도 없었다.
그래. 괜히 따라왔고,
괜히 질투했고,
괜히 마음이 흔들린 거다.
그냥... 다 잊고, 조용히 살아야지.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지.
나는 오늘도 일자리를 찾으러 내려왔다.
어차피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그나마 몸은 멀쩡하니, 품이라도 팔아야 했다.
시장은 아침부터 북적였다.
“새벽에 갓 딴 채소요!”
“손맛 좋은 엿장수 왔소~!”
사람들은 틈을 비집고 다니다 보면,
세상에 없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 난 이 시대에선 ‘없는 사람’이니까.
신분도, 이름도, 기록도 없는...
그때였다.
시장 골목 끝, 작업복을 두른 남자가
천 하나를 어깨에 걸치며 소리쳤다.
“이보소, 젊은이! 몸 좀 튼튼해 보이는데, 짐 좀 나를 생각 있소?”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삯은 밥이면 됩니다.”
남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턱짓을 했다.
“좋아. 당장 따라와!”
짐 나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적당히 무거운 걸 들고,
적당히 땀을 흘리고,
말없이 일했다.
“어이,자네 일 잘하네. 말도 없고.”
사내가 내 손에 조심스럽게 뭔가를 쥐여줬다.
작은 천 주머니.
그 안에는 은 몇 냥이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짧은 시간에 많이 도와줬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나섰다.
손에 쥔 무게가 어쩐지 익숙하지 않았다.
현대의 돈이 아닌,
진심 섞인 무게 같았다.
**
나는 고민 끝에 시장 한 켠으로 향했다.
작고 얇은 머리비녀 하나.
유리처럼 빛나는 옥색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자꾸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거 주세요.”
**
밤이 깊어지고,
그녀의 집 앞.
나는 아무 말 없이 문 앞에 비녀를 놓았다.
종이에 글씨라도 남길까 했지만...
그러기엔 아직 나 자신을 다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고마워서.”
그리고는 조용히 돌아섰다.
**
약초는 멀리 떨어진 골짜기에서 더 잘 자란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의 약을 위해 산을 올랐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설”
적산이었다.
누구나 이름을 알 법한 포도청 사또.
그의 웃음은 언제나 친절했지만,
그 웃음 너머에 감춰진 무언가가 늘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 깊은 산까지 홀로 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오.
그대같이 귀한 양반 댁 규수라면 더더욱.”
“아버지의 약초입니다. 가볍게 여기지 말아주시길.”
나는 예를 차리되, 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을 돌렸다.
적산은 내 말에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긴, 그런 굳은 심지가 아씨를 아씨답게 만들지요.
그대가 만약 내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 말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산길로 내려왔다.
**
집으로 돌아오니,
문 앞에 작은 천 보자기가 놓여 있었다.
안에는... 옥색 비녀 하나.
햇살처럼 은은한 빛이 나는 물건이었다.
‘...이건, 누구지?’
나는 문득 며칠 전, 뒷산에 쓰러져있던
그 남자가 떠올랐다.
이름은 김도윤이라고 했던가.
세상과 어긋난 눈빛이지만,
어딘가 어긋난 채 살아온 사람의
쓸씀함이 묻어났던.
천천히 비녀를 손에 쥐며,
내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일렁였다.
‘설마...’
작게 미소가 스쳤다.
누군가는 입밖으로 내지도 못할 고마움을,
조용히 이런 방식으로 남기는 사람.
나는 그 비녀를 조심스레 머리에 꽂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다시... 볼 수 있을까요?”
**
나는 다시 산길을 걷고 있었다.
다리는 천근만근처럼 무거웠고,
몸은 온종일 들었던 물건들로 퉁퉁 부어 있었다.
‘하, 이러다 진짜 죽겠다.’
그래도···
그래도 이상하게 나쁘지 않았다.
하루를 땀으로 채우고,
그걸로 산 선물을 조용히 문 앞에 두고 오니
이상하게도 마음 한 켠이 따뜻했다.
‘그 비녀··· 마음에 들었을까.’
그녀가 받았을지, 눈치채지 못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저 바랄 뿐이었다.
‘그녀가 웃었으면 좋겠다.’
한 번이라도.
나를 향해, 진심 어린 미소를 보여준다면.
···그거면 됐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낡은 움막 같은 숙소에 몸을 뉘였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지만,
피우지는 않았다. 라이터가 없기에 말이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에서조차
이상하게 연기처럼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설.”
이름을 한 번, 입 안에서 굴려본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오늘은,
그녀의 웃는 얼굴을 꿈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혼잣말을 뱉듯 중얼거렸다.
“바보 같지··· 내가 이런 짓을 다 하고···”
내가 알던 나였다면,
이런 선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불필요하고 비효율적인 일인지
그동안 살아온 방식이 내게 증명해왔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만은···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녀가 건네는 따뜻한 시선,
당연하게 내민 손길,
경계심 하나 없이 믿어주는 눈빛이
가끔씩···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낯설었고, 무서웠고,
괜히 내 안에 뭔가 건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왜지··· 왜 그 사람 앞에선, 내가 나 같지 않지.’
그녀 앞에서는 내가 말이 느려졌고,
말끝을 흐리게 되었고,
가끔은··· 대답을 피하고 싶어졌다.
나조차도 감당 못하는 감정이 자꾸 꿈틀댔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비녀 하나에, 밤늦게 남의 집 문 앞까지 찾아오는 나.
“하, 진짜 바보 같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말로는 할 수 없는 감사와, 미안함과,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식으로, 조용히 다가갔다가
조용히 물러서는 것뿐이었다.
**
그날 밤,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약초를 다려 아버지의 약상 옆에 놓고,
조용히 등을 돌렸을 텐데···
오늘은 자꾸 문 앞의 그 작은 비녀가 마음속을 맴돌았다.
조심스럽게 머리에 꽂아둔 비녀는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마치 ‘괜찮다’고, ‘여기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사람, 김도윤.
말투도 어눌했고, 처음엔 두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눈 속에 가라앉은 슬픔이··· 자꾸 걸렸다.
누군가는 그를 위험한 사람이라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그는 위험해서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걸.
‘왜 그렇게 자신을 자꾸 숨기는 걸까···’
창문을 열었다.
늦은 밤,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득, 문 밖을 한참 바라보던
그 사람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도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까.
같은 비를 맞고 있을까.
나는 작게 웃으며,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김도윤.”
그 비녀를 바라보다, 나는 문득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차가운 옥의 감촉이,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는데,
그는 조용히 다가와 나를 도왔다.
조용히 고개 숙이고, 조용히 사라지고,
그리고··· 이런 작은 마음을 남겼다.
나는 그가 또 다시 어디론가 사라질까 두려워졌다.
마치 꿈처럼 다가와,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사람처럼.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 말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 속 깊이, 아주 선명하게 새겨졌다.
나는 조용히 등을 돌려 침상에 누웠다.
그리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번엔··· 꿈에서라도, 다시 볼 수 있기를.
창문 틈으로 달빛이 비쳤다.
비녀에 살짝 닿은 은빛이 방 안을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그 밤, 나는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 사람도 오늘은 편히 잘 수 있기를.
마치 누군가의 진심이,
고요히 내 곁에 머문 듯한 밤이었다.
**
오늘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땀에 옷이 다 젖도록 일하고,
숨이 차오를 때까지 뛰어다녔다.
조선이라는 낯선 땅에서
내가 이런 하루를 보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 하루였으니까.
나는 담배 대신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날 기다릴까.
조금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