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사람을 죽일 땐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장이 뛰지도 않았고, 손끝 하나 떨린 적 없었다.
그런 내가-
그녀가 약초를 달이는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저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사람이 있었나...?’
그녀는 웃었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입안은 쓸데없이 마르고, 손끝이 괜히 불편했다.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거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 같은 사람을 아니, 살인마를 왜 믿는건지.
하지만 그녀가 내게 등을 돌릴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움찔’하고 있었다.
이건 뭐지?
사람을 죽일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인데.
**
현재 나는 그녀의 집에서 떠났다.
전날 나의 실수 때문에, 나에게 실망했겠지.
그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눈으로
내게 한복을 건네며 말했다.
“내일 해가 뜨면 떠나세요. 아무도 보기 전에요.”
그 말이 가슴에 박혔다.
이상했다.
살인을 즐기던 나인데-
왜 이런 말에 마음이 무너지는 걸까?
그녀는 나에게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니, 당연히 느꼈겠지.
내가 했던 짓들을 알게 된다면...
하지만 그건 아직 이 세계의 누구도 모른다.
그녀도, 나도... 아무것도 모른 채.
이해할 수 없는 감정만이 이곳에 남았다.
그녀는 나를 도왔다.
나는... 그녀를 납치하려 했고.
그럼에도 그녀는 한 번도 내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녀가 내게 처음 생긴 후회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그녀는 약초를 캐러 나갔다.
병든 아버지를 위해.
이른 새벽, 아무 말 없이 광주리를 들고 나선
그녀의 뒷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창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작고 여렸지만,
그 안에 담긴 결심은... 내 것보다 훨씬 단단해 보였다.
‘나는 살인자고, 그녀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야.’
그 사실이,
나를 조금씩 망가뜨리고 있었다.
이런 마음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다치지 않길 바라는 감정.
그녀가...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감정.
나는 오늘도 혼잣말을 한다.
“...진짜, 미친 거 아냐...?”
그녀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다.
나는 지금,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는 상태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남은 건 딱 세 개.
불도 제대로 붙지 않는 이 조선에서,
이게 얼마짜리 명약인지 아냐고.
“하... 조선시대로 떨어질 줄 알았으면,
두 보루는 챙겨오는 건데...”
입에 문 담배를 바라보다가,
익숙한 습관처럼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없다. 라이터도, 성냥도, 아무것도.
“진짜 미치겠네.”
연쇄살인마 김도윤, 지금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중.
도구가 없으니 나무 조각을 비벼 불이라도 붙여야 하나.
아니면, 연기만 나게 흉내라도 내볼까.
“...이래서 문명은 위대해.”
쓸 수 없는 스마트폰,
남은 담배는 세 개비.
게다가 종이조각이 되어버린 만 원짜리 몇 장.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조선에서는 현금 없는 백수다, 내가...”
시장통에 발을 들이자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밥 짓는 냄새, 말 타는 소리, 상인들과의 고함.
그 와중에 들려오는 목소리.
“짐 나를 사람 없소? 젊은이 어디 없소?”
“짐...? 뭐, 할 수 있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저요. 저 할게요. 월급은 밥이면 됩니다.”
그러자 상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월급이 뭣이요?”
“아, 그러니까... 삵이요. 밥 한 그릇이면 됩니다.”
“허허, 요상한 말투 쓰는구만. 알았소! 밥은 특별히 두 그릇 주지!”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조선 알바가 시작됐다.
**
“야, 젋은 친구! 생각보다 잘하잖아!”
“하... 내가 지금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스... 뭐?”
“아니에요. 그냥 밥 주세요.”
**
나는 그날 저녁,
따뜻한 보리밥 한 그릇과 시래기국을 얻었다.
“...미쳤네. 이게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거야?”
문명이 그리워도
이 시대엔 이 시대만의 방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흐릿한 안개 사이로, 댕기를 곱게 늘어뜨린 여인.
‘저건... 한설?’
나는 반사적으로 등을 돌렸다.
그녀도 나를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뒷길로 사라졌다.
‘...말 걸고싶다.’
두 손을 꼭 쥐고 다시 그녀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그때-
“야! 거기!! 도망가지 마!!”
시장 쪽에서 고함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어떤 남자가 물건을 들고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그 남자가 달려오는 방향은... 하필이면 한설이 사라진 그 골목.
“망할...”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내 발은 이미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뒷골목으로 달렸다.
생각보다 골목은 좁았고, 도망치던 사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 뭐야 넌!”
“아, 나도 몰라 이 상황이...”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고,
정확히 남자의 멱살을 낚아챘다.
‘어라...?’
남자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나뒹굴었고,
그가 들고 있던 자루가 터지며
고기며 떡이며 우수수 쏟아졌다.
“잡았다아!!!”
뒤이어 달려온 상인이 숨을 헐떡이며 내게 외쳤다.
“이 사내야! 용감한 사람이었구먼!”
“어이, 저 청년이 잡았어! 물건도 멀쩡하고!”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더니,
나를 둘러싸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아이 하나가 고기 한 점을 건네주며 말했다.
“아저씨 멋져요!”
‘...멋지다는 말,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데.’
그때였다.
조용히 돌아서던 그녀의 시선이 내게 다시 머물렀다.
그녀의 눈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이거... 괜찮은데?’
사람들의 박수가 잦아들고, 잠시 후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반쯤 꺾인 다리를 털고 조용히 돌아섰다.
**
조금 떨어진 언덕 위.
그곳은 그녀의 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결국 집으로 돌아갔네.”
나는 작은 돌에 걸터앉아 집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뱉었다.
거기선 그녀의 작은 그림자가 희미하게 오갔다.
멀리서도 그녀의 바쁜 손짓이 눈에 들어왔다.
고기 한 점으로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이야.
“나 진짜...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머니를 더듬다가...
멈췄다.
“...아, 불이 없지.”
조선시대. 당연히 라이터 따윈 없다.
이딴 곳에선 담배 하나 피우는 것도 고행이다.
“왜 난 라이터를 안 챙긴거야...”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불 피우는 사람... 없나?”
그때, 멀리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있는
마을 아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한 손엔 장작, 다른 한 손엔 부채.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슬며시 담배를 주머니에 넣었다.
“됐어. 금연하자.”
**
나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다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사람이... 김도윤이.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갈채를 받고 있었다.
‘용감한 청년’, ‘도둑을 잡은 의인’,
심지어 아이가 고기 한 점을 건네며 말했다.
“아저씨 멋져요!”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말 이상한 분이네...”
그는 처음부터 이상했다.
말투도, 행동도, 눈빛도.
무엇보다도- 가끔씩 너무 슬퍼 보이는 그 표정이.
나는 애써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시는 엮이지 말자’
머릿속에선 그렇게 되니었지만,
마음은... 자꾸 그를 따라갔다.
집에 도착해 아버지의 안색을 사리고,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방 안에 쑥 냄새가 은은히 퍼졌고,
불씨 위에서 약탕이 보글보글 끓었다.
그러다 문득-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우리 집이 보이는 언덕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김도윤이었다.
그는 조용히 우리 집을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시 엮이지 않겠다며... 왜 또 보고 싶은 거야.”
작게 중얼거리며,
나는 다시 약탕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약탕이 끓는 소리에 맞춰 마음도 끓어올랐다.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그 사람의 뒷모습이
자꾸만 마음속에서 떠오른다.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들어...’
나는 손끝으로 약탕 뚜껑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안에서 쑥과 천궁, 황기가 뜨거운 김과 함께 피어올랐다.
“김도윤...”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아보았다.
처음 들었을 땐 낯설기만 하던 이름이,
이젠 익숙하게 굴러갔다.
‘정말... 어디서 온 사람일까?’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
눈빛이 말해준다.
그리고... 그 속에선 외로움이 느껴진다.
‘그래서, 자꾸 마음이 가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은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다.
아버지의 약을 다리고,
마을 약초를 정리하고,
내일은 또 산에 가야 한다.
그 사람과 엮이면...
어쩌면 평온한 일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평온한 삶을 바라던 사람이었을까?
나는 문득,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순간이 떠올랐다.
피범벅이 된 낯선 남자.
모든 걸 잃은 것처럼 쓰러져 있던 사람.
그때 나는,
이 사람은 다르다고 느꼈다.
“아버지... 저, 바보인가 봐요.”
불 앞에 앉아 혼잣말을 하며
약탕을 조심스레 저었다.
그 사람을... 다시 보고 싶다.
**
나는 아직도 그 집을 바라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앉아 있다.
“하...”
숨을 내쉰다.
조선이라는 이곳, 너무 낯설다.
하지만... 이상하게, 익숙해지고 있다.
‘나, 도대체 뭘 해야 하지?’
살인을 멈춘 나는, 살인을 하지 않는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지?
조선에 떨어진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처음으로 ‘멈춤’을 경험하고 있다.
쫓기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고, 듣고, 걷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욕망도 없고, 분노도 흐르지 않는 이 나날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경계에 서 있는 기분이다.
내가 죽이지 않은 사람,
내가 지켜보고 있는 사람.
한설.
그녀는 내가 알던 누구와도 달랐다.
이해하려 들고, 겁내지 않고, 내게 다가왔다.
그녀를 다치게 하지 않았던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지금처럼 살 수 있다면...’
그녀 곁에서, 지금처럼.
하지만, 나는 사이코패스다.
정상도, 평범도, 사랑도 모르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내게 감정을 주는 그녀가, 미친 건 아닐까?’
나는 무심코, 멀리 마을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집 굴뚝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중얼였다.
“다시... 보고 싶다.”
그 감정이 사랑일지, 아니면 죄책감일지
나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 인정한다.
그녀를 다시 보면 또 말을 걸고 싶을 거다.
그게 시작이라면... 나쁘지 않겠지.
“한설... 한설...”
그녀의 이름을 두 번 불러본다.
그만큼 보고 싶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