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도 사랑할 줄 안다.

“그를 다시 보고 싶다.”

by 서편

해는 어느새 중천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곳 시간은 현대보다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요했다. 지나치게.

그 고요함이 불편했다.


나는 초가집 구석에 앉아,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은 여전히 피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 손으로 그녀를 해치지 못했다.


‘...왜 안 되는 거지?’


오늘만 세 번째다.

약초를 다듬는 틈, 아버지 약을 챙기는 틈,

그리고 방안에서 마주쳤을 때까지.

모두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숨소리마저 조절했고,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붙잡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기회는 늘 내 앞에 있었지만, 손끝이 따라가지 않았다.

심장이, 자꾸만 거슬렸다.


‘심장이... 뛰고 있다.’


나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있는 안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호 너머로,

조용히 움직이는 그녀의 그림자가 보였다.


“망할 감정... 없어야 할 감정인데.”


내 눈은 이미 식은 눈빛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번엔... 반드시 끝내야 한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걸음을 내딛었다.


안채에 다다르고, 조용히 문을 열려는 순간-


“거기서 뭐 하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그러나 어딘가 부드럽게 들려왔다.

나는 문고리에 걸친 손을 살짝 움찔하며 멈췄다.


“아, 그냥... 좀 걱정돼서.”


그녀는 손에 약초가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볼에 붙어 있었고,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친 몸은 좀 어때요?

그래도 오늘은 말이 좀 더 또렷하네요.”


“괜찮습니다. 덕분에.”


나는 시선을 피하며 짧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짧은 말에도,

무언가가 목에 걸린 듯 불편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근데... 왜 방 앞에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어요?”


“...그냥. 문득 생각이 좀 나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왔다.

그녀가 옆에 스쳐 지나가는 순간,

나는 다시 느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감정.


지금, 이 순간.

차라리 그녀를 죽이는 게 더 쉬웠을 텐데.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거지.”


“뭐가 흔들려요?”


그녀가 물었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이상한 옷차림, 낯선 집,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그리고-

내 마음까지 이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입술이 마르고,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서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김도윤입니다.”


“도윤... 김도윤이요?”


그녀가 내 이름을 따라 불렀다.

익숙하지 않은 조선의 억양 속에,

낯익은 내 이름이 묘하게 울렸다.


“그럼... 성은 김, 이름은 도윤이군요.

신기한 이름이에요.”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저는 한설이에요. 한 씨 집안의 둘째 딸이에요.

의원을 도우며 지내고 있어요.”


“한설...”


내가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리자,

그녀가 작게 웃었다.


“근데... 김도윤님은 정말...

한국이라는 곳에서 오신건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조심스럽게 나를 향했다.

거짓말을 해도 믿을 거 같진 않았다.

이미 말한 걸 돌이킬 수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당신이 아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시대예요.”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곧 작게 웃었다.


“그래서 말투도 다르고,

입고 있던 옷도 이상했던거군요.

처음 봤을 땐, 귀신이라도 본 줄 알았어요.”


“귀신이라.... 나도 그래요.

여기가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헷갈릴 정도니까.”


“그래도... 정상이네요. 사람 말도 잘 하고,

아픈 이도 도와줄 줄 알고.”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내게 웃음을 건넸을 때,

어쩐지 속이 불편해졌다.


‘왜... 저런 눈으로 나를 보는 거지?’


한때 스물 여섯을 죽인 살인마.

그런 나에게 저렇게 따뜻하게 웃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


밤이 깊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등잔 불빛만이

벽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는 담요를 펴주고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잠은 잘 수 있겠죠? 저는 마루에서 잘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요.”


“잠깐만요.”


그녀가 돌아본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릿속에서는 단 하나의 문장만 반복됐다.


‘지금이 기회야.’


이곳은 조선. 법도 없고, 감시도 없다.

그녀를 묶어두면, 다시는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도구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손에는 미리 준비해둔 천조각이 들려 있었다.


“김도윤...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조용히 뒤로 돌아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뭘 하려는 거예요...?”


“미안합니다.”


그 말이 입에서 새어나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은... 분명 나도 모르게 나온 진심이었다.


그 순간-

그녀가 갑자기 힘을 주며 내 손을 뿌리쳤다.


“당신, 뭐하려던 거예요...?”


눈이 커졌다.

단호함이 깃든 목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나... 묶으려 했죠?”


나는 입을 열지 못했다.

순간, 어떤 말도 그 앞에서 무의미해 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감싸쥐었다.


“...이유가 뭐든, 그건 아니에요. 사람을 다치게 해서

뭘 얻으려는 건... 아무리 절박해도, 아니에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묘하게 가슴이 먹먹했다.

정당한 처벌도 아니고, 감정도 없는 내가... 왜.


“...당신이 다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 말이 또, 진심처럼 흘러나왔다.


그녀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 눈동자 속에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연민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당신... 진짜로 위험한 사람이네요.”


그리고 그녀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등장 불빛 아래,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거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방에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는 얇은 보자기에 싸인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그것은 남성용 한복이었다.


“...이거, 내 아버지께서 입으시던 옷이에요.

당신 체격엔 조금 크겠지만, 당장은 괜찮을 거예요.”


나는 말없이 옷을 바라봤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떠나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조용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마을에 있으면 위험해요.”


“.....”


“그러니까, 이 옷으로 갈아입고,

아침 일찍, 다른 사람 보기 전에 나가주세요.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옷을 내게 내밀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동안, 도와준 건 진심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묶으려 한 것도 사실이니까.”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게 당신 방식의 생존이었다면... 이해해요.

그래서 더더욱, 이 마을에 머물러선 안 돼요.”


한참을 멈춰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한복을 받아들었다.


그녀는 조용히 마루로 발걸음을 옮기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 옷은 꼭 갈아입고요.

지금 모습으로 돌아다니면,

정말로 잡혀갈 수도 있으니까.”


문이 닫히고, 방안은 고요해졌다.

손에 남은 옷감의 감촉이 묘하게 쓰라렸다.


떠나라.

하지만, 도와준 건 진심이었다.


이 말이, 귓가에 오래 맴돌았다.


**


햇살은 아직 닿지 않았지만,

새벽 공기는 이미 밝아 있었다.


새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낮은 소리로 아침을 알렸다.

마을 어귀에는 장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하나둘 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한설의 말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낯선 천의 촉감이 어색했지만,

그래도 이 마을에선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이제 떠나세요.”

그녀는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그래, 어쩌면 이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이 이상 엮이면... 좋을 리 없지.


나는 문을 열고 마당을 걸어 나갔다.

발소리는 일부러 더 크게 냈다.

그녀가 ‘정말 떠났구나’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마을 어귀를 돌아나가자마자 몸을 숨겼다.

높은 담벼락 뒤, 그늘진 외딴 지붕 위.


“떠나긴... 누가.”


나는 숨죽인 채 그녀의 집을 바라봤다.

그녀는 조용히 마당을 쓸고 있었다.

살짝 흘러내린 댕기를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넘기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가 웃으면 나도 따라 웃게 되고,

그녀가 고개를 떨구면 괜히 가슴 한켠이 찌릿했다.


‘왜지... 내가 왜 이러는 거지?’


그녀가 본 사람 중, 내가 가장 무서울 사람이었을 텐데.

그녀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받아주려고 했다.


나는 담벼락 위에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냐, 김도윤.”


하지만 몸은 이미 그 집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그가 떠났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아침 찻잔을 준비하면서도,

방금 전 마당을 쓸던 순간에도

자꾸만 문 너머가 신경 쓰였다.


“이 한복 입고, 내일 날 밝기 전에 조용히 떠나세요.”


그렇게 말해놓고도,

마음 한구석은... 이상하게 시끄러웠다.


‘그는... 정말 떠나셨을까요.’


담은 낮았다.

문득 고개를 들면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진짜로.


나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었다.

밖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그가 떠났다면, 발자국 하나라도 남았을 텐데...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그게 더 낯설고, 더 서운했다.


‘왜죠... 당신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거죠...’


그가 처음 깨어났을 때,

그 눈빛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공허하고, 위태롭고,

어디에도 닿지 않는 그런 눈.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도

그렇게 텅 빈 눈을 본 적은 없었다.


“김도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문득, 담장 너머에서

미세하게 무언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쪽을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누군가가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설은 천천히 대문을 닫았다.

가슴 어딘가가 쿡, 하고 아팠다.

그가 정말 떠난게 맞는 걸까.

혹시, 담 너머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고요한 아침 안개 속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정말... 다시는 못 보는 걸까.”


자꾸만 마음 한 켠이 뒤척였다.

이상하게도, 그가 신경 쓰였다.


그를 다시 보고싶다.

이게... 내 속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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