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목이랑 얼굴색이 달라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때의 불편함

by 제갈혜진



어릴 적에는 단 한 번도 예쁘다는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다. 행위에 대해 “아이구~ 예쁘네.”라는 칭찬은 들었으나 이것은 ‘착하다’라는 의미 혹은 행동이 예뻤던 것이니 제외하겠다. 간혹 ‘귀엽다’라는 말은 들었으나 그것 역시 주로 언니, 오빠들의 귀여움이었다.


외모에 대한 놀림은 꽤 많이 받았다. 피부가 특이할 정도로 까무잡잡했는데 그에 맞게 ‘깜둥이’ 같은 인종 차별적 놀림, 삐뚤빼뚤한 치열 때문에 비버 혹은 토끼 이빨 등 못생겼다와 같은 식의 별명까지. 어떤 남자애가 다른 남자애를 놀리고 싶으면 “응~ 네 여친 OOO.”을 날리기도 했다.


그런 내가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넘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엄청나게 위축되었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다. 어릴 적부터 나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을 줄곧 갖고 있었으니까.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피부가 하얀 친구들에 대한 부러움과 예쁜 친구들에 대한 동경은 있었다. 그 친구들 앞에서 위축되었던 적도 있었다. 친구들과 같이 놀고 헤어지고, 교실로 돌아갈 때 남자애가 날 찾아온다. 그 이유는? 내 친구에 대해서 물어보기 위하여. 이런 상황도 많이 겪어서 익숙하게 대처하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꾸밈에 대해 관심은 없었다. 발품 팔아서 옷과 화장품을 사기에는 귀찮았고, 매일 그 행위를 수행하기에도 번거로워서 애초부터 꾸미지 않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입학식 날, 나만 후줄근한 츄리닝에 쌩얼로 오리엔테이션 수업을 들었고, 예쁘게 꾸며 입고 온 처음 보는 동기들에게 위축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 후로 조금씩 뷰티와 패션에 대해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난 파운데이션 25호 정도의 피부색이다. 아마 남성분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냥 꽤나 까무잡잡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난 굳이 21호 파운데이션을 사가지곤 얼굴과 목의 피부톤이 확연히 다른 일명 달걀귀신 화장에 입문했다. 입술은 무조건 진한 색깔로. 아이섀도나 아이라이너는 아직 익숙지 않아, 하얀 피부에 빨간 입술로 변신하는 것에 만족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장 기술이 생겼고, 그때 목과 얼굴의 색을 맞추기 시작했지만 얼굴에 손을 올릴 수가 없었다. 최대한 하얗게 덮어 놓은 얼굴에 갈색 손이 올라가는 것은 흡사 다른 사람의 손과도 같았다. 거울 보며 얼굴과 손을 동시에 보면, 나마저도 이질감을 느꼈다.

하얀 피부를 위해 살이 타지 않게 선크림을 열심히 바르고, 비타민을 챙겨 먹는 등 열심히 관리했지만, 얼굴에 손이 올라오는 순간, 그 색의 차이는 여전히 너무도 극명했다.


지금의 내 피부톤은 그때보다 더 어둡다. 바닷가에서 자연 태닝을 주야장천한 덕에 많은 이들이 교포냐고 물어볼 정도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 피부색이 정말 마음에 들고, 조금 더 살을 태우고 싶어서 여름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 겨울이 되어 피부색이 조금 하얘진 느낌이랄까. 파운데이션은 25호를 쓰고 있다. 그보다 어두운 것은 찾기가 어렵더라. 그래도 예전처럼 얼굴이 동동 떠다니는 느낌이 아니라서 만족하며 사용하고 있다.


왜 갑자기 내 피부색을 인정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난 비주류로 들어가겠다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의 일이다. 아무리 하얗게 얼굴을 발라도, 도화살 메이크업처럼 여리여리한 느낌을 주는 화장을 해도 어울리지 않고, 무언가 부자연스러웠다. 누군가를 따라하려고 아등바등하는 내 모습에 신물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타일로 바꾸기로 다짐했다. 꽃무늬 원피스와 구두 말고, 조금 더 편안한 느낌의 캐쥬얼한 옷차림. 공들여 화장해서 얼굴에 손도 못 대는 것보단 간지러우면 박박 긁어도 될 정도의 자연스러운 피부톤. 그리고 난 개인적으로 스모키 메이크업과 히피펌의 조합처럼 약간 펑키하고, 강렬한 느낌이 좋다!! 그게 내 눈에는 가장 매력적이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래서 결심했다. 비주류로 살아가기로. 사실 그런 센 여자 스타일은 그리 인기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내가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존재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나. 타인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기 위해 나를 만들어 가고 싶지 않았다. 관심과 호감도 좋지만, 내가 정말 원하는 모습으로 나를 치장하고, 유쾌한 상태로 놀고 싶다.


그런데 웬걸. 좋아하는 사람은 또 이런 스타일의 나를 좋아하더라. 사실 전보다 관심과 호감을 더 많이 받게 돼서 아리송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아마 내가 나를 존중하고 아껴주기 때문에 생긴 자신감이 아닐까 싶다. 타인의 시선을 갈구하지 않고,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봤을 때 차오르는 자존감일 것이다. ‘비주류여도 괜찮다. 타인의 인정보다 나의 만족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나서 확실히 사람을 대하는 일도 여유로워졌으니까. 결국 외모는 나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존재를 진정 알기 위해서는 외모가 아닌 결국 내면을 봐야 한다.


어쩌면 난 사람을 바라볼 때, 그들의 외모로 판단했기에 외모적 강박이 생긴 것은 아닐까. 우열을 가리며 마주한 사람의 얼굴과 옷차림을 면면히 뜯어보기만 하지는 않았을까. 어떤 판단이든 결국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고, 그 잣대가 나를 가둔다. 내가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내면에 집중할 때,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때 비로소 난 자유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