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be or Not to be

주체의 삶을 사는가, 예속의 삶을 사는가

by 수빈

지난해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의 메마른 인문학 풍토에서도 꽃을 피운 그의 재능에 모두가 찬사를 보냈다. 일각에선 이 경사를 인문학 번성의 씨앗으로 삼고, 인문학도 양성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문학 전공자로서 참 반가운 소식이다. 그간 '사회는 인문학도가 아니라 인문학도 할 줄 아는 이공계열 전공자를 선호한다'는 뼈 있는 농담을 숱하게 들어서 그런가. 인문학을 부속물 취급하는 시대에 인문학도의 저력과 인문학의 가치가 주목받는 사례를 몸소 느껴 감사하다.


오늘날 사회 전반엔 실용 학문을 선호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유용성을 좇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식으로 제 학문의 가치를 증명한 분야는 번성했다. 반면 인문학과 같은 순수 학문은 현시대에 발붙이지 못한 모습을 보여왔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쓸모를 증명하라는 과제에 당면한 것이다. 학문의 가치를 자본주의 시장의 잣대로만 평가함을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인문학의 가치는 그 틀 안에서만 정해지지 않는다. 계량화되지 않을 뿐, 유용성의 기원은 인문학이었다. 기술 공학의 모태는 예술이었고, 자연과학의 출발점은 철학이었다. 또한 인문학은 말과 글, 인간을 탐구함으로써 인간 문명의 근본이 되었다. 이는 숫자로 산정되는 값 이상의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나, 가시적인 성과를 추구하는 현시대엔 그 뜻이 외면당하는 추세이다. 그런 와중 그 가치를 구체화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낭만주의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이다.

18세기, 산업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에 워즈워스는 시를 써서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이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통해 도덕적 성장, ‘bildung’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보았다. 이때 아름다움은 시를 탐닉함으로써 경험할 수 있다. 그 경험이 휘발될 수도 있지만, 그때의 감정은 마음속 어딘가 남아 사람들이 완숙한 정신세계를 구축하는 기반이 된다. 아름다움에 공명한 순간이 축적되면 사람들의 정신이 바뀔 것이고, 궁극적으로 세상도 바뀔 것이다. 그러니 그 원대한 목표의 출발점,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시인이야 말로 세상의 정신적 지주인 셈이다. 그의 이야기는 인문학이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는 사실을 역설하며, 인문학도가 세상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사람임을 체감하게 한다.


이에 혹자는 낭만주의 시대에나 통하는 이야기라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워즈워스가 살았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18세기의 영국은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생산성을 극대화했지만, 동시에 기계적인 노동 이외의 가치 추구는 불필요하게 여겨졌다. 개인은 거대한 톱니바퀴의 부품이 되고 인간 소외를 겪었다. 시간이 흘러 21세기, 작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여전히 끈질기게 물질적인 가치를 좇으며 노동의 굴레에 빠져 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개인이 노동 착취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노력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스스로가 생산을 극대화하려는 사회의 파편임을 간과한다. 그리고 사회가 주입한 자유 의지에 속아 기꺼이 기계적인 노동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착취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인간의 영혼은 경색되고, 인문학을 통한 세상의 탐구는 무용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상황 속 인간이 마주한 질문은 ‘To be or not to be, 주체의 삶을 사느냐 예속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다. 언젠가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물질적인 가치와 가시적인 성과만을 추구하는 사회에 예속된다면, 그 이상을 상상하긴 어렵다. 그러나 인문학을 통해 인간의 언어를 탐구하고, 세상의 목소리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문명의 이정표를 표상한다면, 비로소 인간은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현실 이상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워즈워스가 말했듯, 인문학의 줄기를 타고 세상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사람으로서 자라나는 것이다. 따라서 인문학의 창으로 세상을 탐구하는 일은 더더욱 필요하다.


소설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으로 과연 우리 사회에 인문학이 번성하게 될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그의 작품에 많은 이들이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앞으로도 인문학의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우리의 삶에 축적된다면, 워즈워스가 갈망한 ‘인문학의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까지 - 인문학이 무용하다고 여기는 시대를 반증할, 오늘과 내일의 인문학도들을 기대한다. 나 또한 한 명의 인문학도로서 펜으로 소망을 눌러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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