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mmy Jul 05. 2022

2022 터키 여행기 - Day 5 파묵칼레

2022.05.19. 파묵칼레


괴레메에서 파묵칼레로 향하는 버스는 밤새 달리며 여러 번 정차했다. 심야 버스라서 다들 조용히 잘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버스에서 만난듯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귀가 잘 안 들리시는지 조금 큰 목소리로 영어로 이야기하고, 바로 앞에 앉은 터키인은 큰소리로 틱톡을 계속 본다. 이 난리 통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J 씨는 잠이 들었다. 나는 아마 잠을 거의 못 잘 것 같은 예감이다. 1-2시간에 한 번씩 중간 도시 들에 정차하면서 간다. 어쩌다 보니 저녁을 걸렀는데도 배는 별로 고프지 않다.

어렴풋이 먼동이 틀 무렵 환승 장소인 데니즐리에 도착했다. 파묵칼레는 너무 작은 마을이라서 오토가르가 없고 데니즐리에서 버스회사에서 운영하는 세르비스라고 부르는 서비스 버스가 운행한다고 한다. 데니즐리에서 내리니 세르비스로 사람들을 몰고 간다. 버스에 자리가 없어서 우리보다 늦게 탄 사람은 서서 가는데, 왜 서서 가냐면서 가는 내내 짜증을 낸다. 30분 정도 달리니 파묵칼레에 도착했다.

버스 기사가 이른 아침이기에 호텔로 가도 체크인을 안된다면서 여행사로 들어오라고 한다. 짐을 맡길 수도 있고 필요한 패키지 등을 안내받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관광 상품 영업을 하는 것 같았다. 버스회사에서 굳이 무료 셔틀을 왜 운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석양과 일출 때가 파묵칼레는 가장 예쁜데, 석양 때는 사람이 많다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에 짐만 맡기고 바로 파묵칼레로 향했다.


일출과 함께 열기구와 패러 글라이더가 날고 있었다. 열기구는 몇 개 보이지 않아서 괴레메에 비해서는 초라해 보였지만 괴레메를 가보지 않았다면 여기도 꽤나 근사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패러글라이딩도 꽤 멋있어 보였다. 기구와 패러 글라이딩 하는 모습을 조금 구경하고 파묵칼레 입장을 위해서 올라가려는데 9시부터 연다고 한다. 아직 3시간 이상 남아있었다. 그래서 호텔로 가기 위해서 다시 짐을 맡겨둔 여행사로 향했다.

그때 한 사람이 스쿠터를 타고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영어를 중심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해보라고 꼬시기 시작하는데 정말 쉼 없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꼬셨다. 한국인은 입소문을 잘 내니 원래 가격보다 훨씬 싸게 110유로로 해주겠다고 시작했다. 어디 묵는지 물어보고 좋은 호텔이고, 자기 이웃이니 예약하면 얼리 체크인을 보장해주겠다는 이야기도 하고, 그냥 관광하는 것보다 패러 글라이딩을 하고 차로 이동해서 관광을 하면 편하게 파묵칼레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하고, 이태원에 자기 친척이 산다는 이야기까지 보태면서 적극적으로 영업했다. 15분가량 적당히 반응해주면서 여행사로 돌아오는 사이 이미 가격은 70유로까지 떨어졌다. 다만 패러글라이딩은 원래 고려한 액티비티가 아니었고 이건 우연히 만났다고 하기에는 너무 좋은 제안이라서 선뜻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필요하면 꼭 당신에게 예약하겠다고 하고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자기 제안을 못 믿는 거냐고 하면서 기분이 나빠졌다고 지금 이 자리를 떠나면 연락을 하지 말라고 한다.

쉼 없이 하는 이야기와 중간중간 섞어 쓰는 한국어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숫자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정확했는데, 한국어로 J 씨와 나누는 의논도 알아듣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보통 다른 사람 조언을 잘 안 듣는 편인 내가 이렇게 흔들릴 정도면 웬만하면 넘어갈 법 한 말투였다. 짐을 찾고 호텔로 가기 전에 다음 목적지인 셀축으로 향하는 버스표 확인을 위해서 여행사에 들어가자 그 아저씨랑 이야기하는 걸 봤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고 하니 웃는다. 역시 내가 느낀 감각이 정확했던 것 같다. 캐리어를 끌고 호텔로 가는데, 마지막 시도를 하듯이 아저씨가 말을 건다. 한 명에 110유로였던 가격이 지금은 두 명에 110유로다. 방금 전보다 더 가볍게 제안을 뿌리치고 호텔로 향했다.

호텔 로비에는 쇼트커트를 한 직원이 있었는데, 터키에서 가본 호텔 중에서 가장 접객업 다운 응대였다. 전문적이고 매뉴얼에 따르는 것 같지만 딱히 정은 없는 마음 편한 서비스였다. 방을 준비해야 해서 지금 체크인은 어렵고 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어제저녁부터 굶었기 때문에 아침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보니 추가 요금을 내면 지금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어차피 기다리는 시간에 아침을 먹기로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원래 뷔페식으로 서비스돼야 할 것 같은 음식들이 코로나의 영향인지 작은 접시에 담겨서 하나씩 서빙된다. 각각 음식은 좋아 보였지만 작은 접시에 눌려서 냉장고에 있다가 갓 나온지라 왠지 식욕이 자극되지 않는다. 음식이 많이 남을 것 같은데 어떻게 처리할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구성은 나쁘지 않았지만 어제 잠을 못 자서 이은 지 식욕은 별로 없다. 고양이들이 와서 계란을 조금 잘라서 나눠주니 잘 먹는다. 아마 아침 식사를 얻어먹으러 자주 오는 것 같다. 다른 손님이 고양이를 부담스러워 하자 직원이 쉿 쉿 소리를 내서 쫓는다. 하지만 쫓아내도 잠시 뿐 고양이 들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돌아와서 인심 좋은 테이블에 모여든다.

식사를 마치고 로비로 돌아오니 곧 우리 방이 준비되었다면서 방으로 안내한다. 매뉴얼이 있는 듯한 서비스를 받아서 여긴 아닌가 싶었지만 안내해주는 직원은 카운터 직원의 오빠다. 여기도 여지없이 패밀리 비즈니스 같다. 안내해주면서 오전에 이 방이 준비되는 것은 운이 좋은 일이라면서 방 문을 열어준다. 창 밖으로 파묵칼레가 한눈에 보인다. 그 말이 납득이 된다. 원래는 꽤 좋은 호텔이었을 것 같은데 세월이 묻어있는 룸 컨디션이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어중간하게 된 시차 적응에 괴레메에서의 여독이 그대로 느껴져서 좀 피곤했다. 버스에서 잠을 거의 못 잤지만 그래도 잠은 오진 않았다.

1시간 정도 뒹굴 거리다가 어쩐지 J 씨에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J 씨는 버스에서 자서 나보다는 덜 피곤할 테고 더 심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심도 사 먹고 해질 때까지 느긋하게 보다가 석양 구경을 하고 내려오겠다는 마음 가짐으로 바로 파묵칼레로 향하기로 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안일하기 짝이 없는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햇볕이 강해 보여서 선크림을 꼼꼼히 바르고 파묵칼레 입구로 향했다. 호텔에서 마을을 통해 나가는 도중에 길가에 여행사에서 패러글라이딩을 권하면서 가격을 말하기도 했는데, 두 명에 50유로까지 들은 것 같다. 뭐 한 명에 50이라고 하더라도 최종 오퍼보다 저렴한 가격을 첫 오퍼로 던지는 셈이다. 결국 아침에 아저씨는 우리에게 바가지를 씌우려고 온갖 감언이설로 꼬셨던 것이었다. 역시 만사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햇볕은 강하지만 습도도 낮고 기온도 20도 내외로 기분 좋게 산책할만한 날씨였다. 천천히 언덕 입구에 있는 파묵칼레 입구까지 걸어갔다. 입장료가 만만치 않은데 옆에 뮤지엄 패스 광고가 있다. 오픈 에어 뮤지엄에 들어갈 때는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이스탄불에서는 모두 자유여행으로 돌 것 같아서 고려해볼 만한 가격인 것 같았다. 뽕을 뽑을 것 같지는 않지만 최소한 입장료 때문에 관광지에 들어가지 않는 바보짓을 하지 않도록 해주는 비용으로는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고 구매했다.


목화(파묵) 성(칼레)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거대한 흰색 대리석 덩어리로 되어있는 산이었다. 하얀 대리석 관리 차원에서인지 입구에서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게 되어 있다. 처음부터 샌들을 신었고 신발을 넣을 비닐 주머니도 준비해서 간단히 신발을 벗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쪽 구석을 따라서 물이 흐르고 있어서 발도 시원하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다만 노면이 고르지 않은 곳에서는 발바닥이 조금 아프기도 했는데, J 씨는 많이 아픈 모양이다. J 씨는 아파서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부분도 꽤 많이 있었다.


처음 올라가기 시작할 때부터 낮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다. 언덕을 따라서 자연 풀장이 계단 식으로 줄지어 있는데, 아래쪽 풀에는 대체적으로 사람이 없다. 아무도 없는 풀에서 혼자 사진을 찍을 수도 있었다. 다만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거리가 꽤 된다. 비정상적으로 큰 대리석 덩어리 때문에 그 사이즈를 잘못 가늠한 모양이다. 아래서 볼 때는 대수롭지 않은 점으로 보였던 것들이 전부 사람이었다.


올라갈수록 점점 헐벗은 사람들이 늘어난다. 일반 복장과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뒤섞여 있다.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은 천연 풀장에 몸을 담그고 놀고 있다.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는 햇볕도 모래사장에서 반사되는 햇볕과 같은 강한 느낌을 준다. 정상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블로그 등에서 많이 본 구도의 사진 포인트가 나타났다. 우리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물이 부족해서 일부만 차 있다는 글이 많았는데, 구역을 나눠서 일부는 물을 대고 일부는 그냥 마른 상태로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히에라 폴리스를 구경하겠다고 한참을 걸어서 반대편으로 갔을 때도 걸어 올라오면서 본 만큼의 자연 풀장들이 널려 있었지만 완전히 마른 상태였기 때문에 이 짐작은 맞는 것 같아 보였다.

정상에 도착하자 매점에서 물부터 사서 마셨다. 출발할 때 가져온 500밀리짜리 생수병은 이미 텅 비었다. 건조해서 땀이 말라서 바로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땀을 꽤 많이 흘리고 있는 것 같다. 보통은 물을 잘 마시지 않는 J씨도 물을 열심히 마신다. 1.5리터짜리 물병은 곧 반 정도만 남았다.

위쪽에 올라오니 넓은 평지가 있는데, 정원과 쉼터가 잘 꾸며져 있다. 안쪽에 유물이 있는 풀장이 있다고 하는데 수영복도 없어서 안 들어가기로 했다. 이 언덕 위 평지에는 죽은 자 들의 도시라는 히에라폴리스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온천이 유명했고 병에 좋은 온천이라고 아우구스투스 시절 로마시대부터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몸이 아픈 사람이 요양을 하러 모이는 도시가 히에라폴리스였는데, 문제는 병자가 많아서 많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무덤이 많아지는데, 아무래도 먼 땅으로 요양을 올만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일 테니 호화로운 무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몇 번의 지진과 주변 지형 변화로 히에라폴리스는 점점 쇠락하고 결국 무덤만 남아 죽은 자들의 도시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히에라폴리스에서 출토된 유적이 모여있다는 박물관을 시작으로 히에라폴리스 구경을 시작했다. 박물관은 규모는 좀 있어 보이는데 유물이 정리되지 않고 막 쌓여있는 느낌이다. 특히 조각상이 많이 있었는데 관리가 거의 되지 않았다. 한쪽 조각상에서 이상한 가족을 목격했다. 부모가 조각상에 모자를 씌우고 만지면서 사진을 찍자 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목이 없는 조각에 기대면서 자기 얼굴을 내밀고 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이야 사리판단을 못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부모가 참 못나보였다. 박물관 구경을 대충 마치고 다시 매점으로 돌아왔다. 새로 산 물도 다 마셨고 출출해서 샌드위치와 물을 사서 쉬면서 간단히 먹었다. 식당 앞 테이블에도 강아지와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들이 애교를 부리면서 음식을 구걸하는데 갑자기 강아지가 와서 쫓아낸다. 겉보기엔 착한 리트리버 친척 같이 생겼는데 식탐에는 약해지는 모양이다.


식사를 마치고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했을 때 히에라 폴리스 반대편을 보기 위해서 북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도상으로 보고 눈으로 볼 때는 그렇게 멀지 않아 보이던 반대편 입구는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타는듯한 햇볕에 익어가며 걸어서 그런지 1킬로 남짓 걸었을 뿐인데도 꽤 피곤하다. 길 주변으로 그늘이 전혀 없다. 한쪽에 사이프러스 나무와 로마 소나무들이 있어서 그쪽으로 걸어본다. 길 건너편으로 향할 뿐인데도 꽤나 멀다. 거인국에 찾아온 걸리버처럼 가까워 보이는 곳도 힘겹게 걸어간다. 그늘을 찾아 들어가 한참 앉아서 쉬면서 의식적으로 물을 마셨다. 길 너머 절벽 쪽으로 향해 가보니 이쪽에도 대리석 자연 풀장이 가득하다. 다만 물이 전혀 없이 바싹 말라 있고, 먼지 때문에 약간 누런색이었다. 길 반대편으로는 계속 무덤이 있다. 네크로폴리스라고 하더니 정말 무덤이 가득하다. 여기저기 빨간 꽃이 피어있는데 J 씨가 양귀비라고 한다. 아편 원료가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게 믿기지 않아서 구글링을 해보니 여지없는 양귀비이다. 도대체 저 양귀비가 열매를 맺을 때면 어떻게 처리하는 것일까? 유적이 멋있긴 하지만 보존 상태도 좋지 않고 각자 너무 떨어져 있다. 카트를 타고 돌아다니는 단체 관광객이 있는데 부럽게 느껴졌다.


뭔가 화려한 문이 보인다. 이 정도면 갈 만큼 갔다는 생각이 든다. 문이 만든 그늘에만 서 있어도 살 것 같다. 사람이 미어터지는 대리석 풀장에 비해 여긴 사람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문을 너머 안쪽에 아고다였던 자리를 통해 유적 사이로 걸어본다. 제대로 서 있는 기둥도 별로 없지만 포럼 혹은 아고다에 서자 여기가 원래 그리스 로마 양식의 도시였음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고다 유적을 넘어서자 다시 푸른 초원뿐이다. 로마 시대의 수도였을 법한 돌길을 따라서 돌아왔다. 다시 한참을 걸어 중심가로 돌아왔을 때쯤 미심쩍은 수질의 더러운 호수가 보였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호수가 원래는 온천인 것 같다. 미심쩍은 수질은 온천 안에 있는 유황 등의 물질 때문에 붉은 침전물이 생겨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까 봤던 말라붙은 자연 풀장 안에 물을 대기 위한 수도가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아니었을까? 기후의 변화 때문이든 지형의 변화 때문이든 지금은 건조해서 그 수량이 부족한 상태가 아닐까 싶다.

중앙의 카페테리아로 돌아와 물을 샀다. 이로써 올라와서 세 번째 1.5리터짜리 물이다. J 씨가 축 쳐져있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J 씨는 말도 못 할 것 같다. 한쪽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그늘 아래에서도 살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아직 남아있다. 목덜미, 코, 팔 등은 아마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익은 것 같다. 2-30분 길고양이를 구경하기도 하고 먼 풍경을 보기도 하면서 쉬고 나자 조금 힘이 생겼다. 석양까지 버티는 것은 절대 무리라는 판단이 들어서 마지막으로 극장만 구경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분명 가까운 곳에 극장이 있는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가보려 한 것인데, 역시나 히에라 폴리스는 거리 감각이 마비되는 공간이었다. 잠시 걸으면 도착할 것 같던 극장은 상상 이상의 규모와 언덕 위의 위치 때문에 가깝게 보였던 것이었다. 다시 20분 정도 땀을 흘리며 등산을 하자 겨우 극장에 도착했다.


올라가는 길 내내 뜨거웠지만 원형 극장 아래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올라오는 고생에 합당한 보상을 제공해주었다. 다만 극장 안에도 그늘이 전혀 없어 햇볕을 피할 수가 없었다. 햇볕을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만 구경하고 다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꽤 많이 불어서 땀이 나면 바로바로 식긴 하지만 햇볕에 타들어가는 피부와 알게 모르게 흘린 땀으로 우리 체력은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다시 카페테리아 근처로 돌아와서 앉았다. 오래 기다린다고 해서 체력이 회복될 것 같진 않다. 결국 석양은 멀었지만 천천히 내려가기로 했다. 다시 샌들을 벗고 풀장 사이로 자연 대리석을 밟으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리를 알아서 일까? 올라가는 길에 비해서 내려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다만 마지막에 샌들을 다시 신는 장소에서 점프해서 건넌다는 것이 발을 헛디뎌서 크게 넘어지고 말았다. 발목이 계단 턱에 제대로 찍혔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을 때 넘어지면 보통 아픔보다 부끄러움이 클 수도 있는데 부끄러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아팠다. 다 내려와서 시계를 보니 의외로 5시에 가깝다. 하지에 가까워 해가 길고 남중 시간이 늦은 곳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흡사 2-3시의 태양 같이 뜨겁다. 이래서는 문을 닫는 7시가 되어서도 별로 붉어질 것 같지 않다. 아무래도 내려온다는 결정은 나쁘지 않은 결정인 것 같다.

호텔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나자 피부에 화끈함이 느껴진다. 제대로 탄 것을 다시 확인하는데, 피부 여기저기가 벌써 빨갛다. J씨도 팔에 선크림이 번지거나 지워진 쪽 경계를 따라서 선명한 빨간 선이 생겼다. 너무 힘들어서 아무것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아서 1시간 정도 조용히 뒹굴었다. 슬슬 배도 고파서 무엇을 먹을지 검색을 하는데 Hiera Coffee House라는 이상한 평점을 가진 가게를 찾았다. 1000개가 넘는 평점을 받으면서 5.0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드시 예약을 해야 갈 수가 있다고 해서 구글맵의 문의 기능을 처음 활용해봤다. 조금 기다리자 7시 반으로 예약 시간이 확인이 되었다. 7시 반에 맞춰서 호텔에서 식당을 향해 걸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고, 이제야 파묵칼레에 붉은빛이 돈다. 파묵칼레 건너편에 위치한 식당에 들어서자 손님이 우리 밖에 없었다. 아마도 서비스 퀄리티를 위해서 손님을 조금만 받고 있는 모양이다. 편한 곳에 앉으라고 해서 꽃으로 장식된 벽 건너편 테이블에 나란히 앉았다.


메뉴를 살펴보니 터키 메뉴와 피자, 햄버거, 스테이크 등 다양하다. 베지테리언을 위한 배려도 되어 있었는데, 팔라펠이 반가워서 하나 주문했다. 나머지 하나는 안전하게 아다나 케밥을 선택하고 콜라를 곁들였다. 메뉴를 고르고 나자 곧 큰 쟁반에 소스를 잔뜩 가져와서 나열하듯이 세워준다. 샐러드 소스, 올리브 오일, 수제 비네거와 19가지 감자튀김용 소스라고 한다. 주인아저씨는 우리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신난다는 듯이 돌아간다. 목화 성(파묵칼레)에서 내려오니 소스 성이 우리를 포위하는 기분이랄까? 잠시 기다리자 콜라를 가져왔는데 서비스 좋은 펍에서 생맥주를 따라줄 법한 얼린 컵에 얼음을 넣고 거기 따라준다.


메인 메뉴가 서빙되자 보통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은 실감으로 돌아왔다. 고기의 굽기나 양념부터 시작해서 사이드의 품질 조합까지 뭐 하나 부족한 점이 없었다. 걸신들린 듯이 먹어 치우면서 고기력이 부족한 것 같아서 양꼬치를 추가로 주문했다. 음식을 남기고 싶진 않아서 고기만 구워 달라고 주문하려는데 J 씨가 감자튀김은 달라고 한다. 소스가 다양해서 그런지 J 씨는 감자튀김이 맘에 드는 모양이다. 소스만 7-8가지를 먹어봤는데, 랜치 소스와 갈릭 소스가 가장 맛있었다. 특히 Calve라는 브랜드는 처음 보는데 하인츠에 뒤지지 않는 맛이었다.


음식을 다 먹어갈 때쯤 추가 감자튀김과 양꼬치가 나왔는데, 감자튀김 양이 장난이 아니다. 음식을 남기고 싶지 않았는데 분하게도 결국 감자튀김은 절반 정도 남기고 말았다. J 씨 표현에 따르면 방심하고 감자를 달라고 해서 감 줄났다고 한다. 감자튀김의 퀄리티로 나중에 짐작한 것인데 스테이크나 햄버거도 퀄리티가 장난이 아닐 것 같다.

이때쯤 손님이 한 팀 들어왔다. 1시간 정도 지났으니 30분이나 한 시간에 한 팀씩 받는 모양이다. 이분들도 메뉴를 주문을 하는데 네 개를 주문하려고 하자 주인아저씨가 너무 많을 거라고 줄여서 주문을 받는다. 저쪽 테이블에도 마찬가지로 소스의 성을 쌓아줬는데 우리처럼 Good surprise의 반응을 보이자 아빠 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는 주인아저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칠 때쯤 너무 만족한 식사를 했기 때문에 꼭 돈줄을 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메뉴를 뒤져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터키 식당에서는 대부분 테이블보 위를 빗자루로 쓸어서 정리한다. 처음 봤을 때는 위생적으로 괜찮은 것일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며칠을 보내는 동안 익숙해져서 이제는 별 감흥이 없다. 그런데, 이곳 테이블에는 테이블보가 없다. 식사를 마쳤는지 확인하고 접시를 치우고 나자, 청소제를 스프레이로 뿌리고 행주로 깔끔하게 닦는다. 청소제 스프레이 냄새도 심상치 않은 것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세제 같다.


이윽고 서빙된 커피는 콜라를 담아 내왔던 맥주잔에 담겨있었는데, 무겁고 진한 맛이 완전히 취향저격이었다. 한국 유명 로스터리에서 마시고 있다고 해도 믿을 맛이었다. 아이스크림도 보통의 아이스크림이 아니었는데 캐러멜 향이 특별한 것으로 보아 직접 만든 터키 아이스크림 같았다. 돈줄을 더 내야 할 것 같아서 터키쉬 커피를 추가로 시켰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 제대로 끓인 터키쉬 커피는 이런 맛이구나 싶다. 막판에 불편한 커피 미분도 어떻게 한 것인지 바닥에 잘 정리되어 있다. 터키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다른 테이블에서 시킨 듯한 바클라바가 나간다. 한 접시 가득 담겨 있는 바클라바는 전문점에서 한 상자를 구매할 때의 양이었다. 아쉽게도 배가 불러서 바클라바까지 주문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우리가 식사하는 2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지나가던 세 팀 정도가 식사할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주인아저씨는 항상 예약을 하고 방문해달라고 했다. 예약된 손님만 받는 전략도 철저히 서비스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 같았다. 만족의 긍정적 되먹임이라고 해야 할까? 만족스러운 고객이 리뷰로 칭찬하고 칭찬받은 주인은 서비스 퀄리티를 더 높이는 것을 반복하다가 보니, 주인아저씨가 묘한 집착이 생긴 게 아닐까?

호텔 방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식당 리뷰를 열심히 작성했다. J 씨는 식당 리뷰를 자세히 읽어보고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받는 서비스를 전부 쓰고 싶지만 악용할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적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확실히 기대하고 갈 때와 기대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가 다를 것이다. 게다가 저런 식당이 유지되는 원동력인 긍정적 되먹임에는 악용하는 악의를 가진 고객이 가장 큰 적이니 통찰이 있는 리뷰라고 생각했다.

히에라폴리스에서 바싹 익어버리면서 조금 힘든 하루였지만 식당에서의 경험이 피곤까지 다 잊게 만들었다. 내일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셀축으로 이동해야 한다. 오전 내내 비가 예상되는데 우리가 이동할 때는 비가 많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 늦은 식사에 커피까지 잔뜩 마셨는데도 햇볕에 고생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일찍 잠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2022 터키 여행기 - Day 4 카파도키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