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ape From 'Mad China'

8. 약속

by 스캇 리

근 6개월 만에 외식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미국 땅을 다시 밟을 때부터 고대해 왔던 브레드 영사와의 저녁약속이라 그런지 낮부터 괜스레 들뜨고 좀처럼 없던 식욕마저 도는 것 같았다.


"여보 정말 괜찮겠어?"

아내는 아직도 내 건강 상태가 못 미더운지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면 계속 확인에 또 확인 중이다.

LA 이모는 나를 볼 때마다 살아 있는 기적이라고 감탄에 마지않지만 나는 내 회복속도가 만족스럽지 못해 늘 조바심이 난다. 특히 혼자 고군분투하는 아내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그 조바심은 더해간다.

팬데믹쯤 시작된 아내의 갑작스러운 이 고생은 나 때문에 이젠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팬데믹 종식을 축하하는 분위기인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도 힘든 내색,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언제나 나와 아이들을 지켜주는 아내의 든든한 모습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우리 가족의 예기치 못한 불행은 팬데믹과는 무관했다. 그저 코로나 발병과 종식까지의 3년 4개월이란 기간과 시간의 궤적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심각한 코로나에 걸려 간신히 목숨을 구했고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우한짜요!"(武漢加油·우한 힘내라), "중궈짜요!"(中國加油·중국 힘내라)


충격적 코로나 발병으로 인구 천만의 중국 우한이 난리가 났을 때 나는 중국 공안에 체포된 상태였다. 미중 무역 갈등으로 시작된 두 나라 간의 싸움은 순식간에 최고조에 이르렀고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계 미국인 학자와 유학생 그리고 화웨이 그룹 부회장까지 간첩죄로 엮어 넣자 시진핑 공산당 역시 맞불 작전으로 나섰다.

중국 내 미국인은 물론 미국의 우방인 캐나다, 호주 국적의 사업가, 기자 등 하여간 조금만 의심 가는 인물들은 가차 없이 체포했다.

그 와중에 미국 시민권자인 나는 로마 가톨릭 재단이 중국에 설립한 호스피스 병원의 원장으로 나와 있던 지인, 그리고 중국 내 외국인이 세운 (기독교 재단) 과학기술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아내와 함께 하루아침에 간첩혐의로 체포되고 말았다.

영문도 모른 채, 모든 면회가 불허된 구금 생활 중에 나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이 바로 오늘 다시 만나게 될 미국 선양 총영사관의 브레드 영사였다.

그때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처음 해준 말이 아직도 귀가에 생생하다.


"bad timing, bad luck "


그리고 그의 말처럼 미국 정부의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으로 중국 공산당의 반미 감정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달었고 나는 브레드 영사의 갖은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2년을 넘게 중국 감옥에 고스란히 투옥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와는 국적이 다른 아내와 지인은 겨울이면 영화 20도가 넘게 내려가는 혹독한 중국감옥을 체험하지 않고 일찍 석방된 일이었다.


"이젠 아주 잘 걷네^^ "


펭귄처럼 조금은 뒤뚱 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휠체어에서 보행기까지 순식간에 졸업하고 자력으로 걷는 내 모습이 대견한지 아내가 칭찬을 해준다. 조수석에 나를 앉히고 늘 그래왔던 듯 자연스럽게 내 대신 운전대를 잡는 아내의 모습이 이젠 익숙하다.


참담한 시설의 그 감옥에서 내가 인내와 기도로 힘든 싸움을 이어갈 때 아내는 어린 막내를 데리고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내 옥바라지를 했다.

나는 아직도 그때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나 낯설다.

원체 겁이 많아 tv에서 조금만 무서운 장면이 나와도 두 눈을 찔끔 감고 또 고소공포증까지 있어 그 멀리 그랜드 캐넌까지 가서도 제대로 구경조차 못하고 온 아내였다. 그런 아내가 나를 그곳에서 빼내기 위해 보여주었던 행동들은 지금도 경사가 조금이라도 높은 길에 들어설라 치면 핸들을 꼭 부여잡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과는 좀처럼 매치가 안된다.

면회는 물론 서신까지 전부 차단되었던 그 당시 아내는 내가 행여나 희망을 끈을 놓을 까봐 참 많은 방법으로 나를 지지해 주었다.

간 크게 교도관의 눈을 속여 가며 책 겉표지 안쪽에 성경에서 떼어 난 로마서를 숨겨 보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반입되는 책들마저 일일이 검사하자 책갈피 가장 안쪽 부분에 깨알 같은 글씨를 딱 하나씩만 적어 편지를 만들어 보내왔다. 난 감시 카메라의 의심을 받지 않고 그 편지를 읽기 위해 이전 페이지의 글자들을 힘들게 기억해 가면 5백 페이지 넘는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아내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아.침.마.다.자.기.를. 위.해.기.도.해

애.들.은. 잘.있.어. 우.릴. 위.해. 힘.내.잘. 참.아.줘


구부리고 앉아, 제대로 쓰기도 힘든 책갈피 안쪽면에 깨알 같은 크기로 한 자 한 자 편지를 썼을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많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스파이 혐의에 대한 증거를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하자 중국 법원은 3번이나 열린 재판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중단하고는 6개월 넘게 휴정하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럴 때마다 아내는 서슬이 시퍼런 공안들의 제지를 뚫고 담당 재판장에게 다가가 거칠게 항의했다고 한다.

5년이 될지 아니면 정말 누구 말 대로 20년이 될지, 변호사도 브래드 영사도 그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갑갑한 상황에서 지금 생각해도 아내는 참 당당하고 용감했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미국으로 추방되어 오던 날 까지도 아내는 침착하게 잘 대응했다.

코로나로 인해 국제 항공 노선들이 당일 예약과 취소가 반복되는, 한마디로 하늘길이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아내는 단 하루라도 더 중국에 머무는 일이 없도록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해 가며 내가 상하이에서 비행기를 타기 한 시간 전까지도 취소와 예약을 반복하며 미국으로 오는 나의 하늘길을 열어 주었다.

덕분에 24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아내의 바람대로 난 지체 없이 중국을 떠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애절함과 간절함이 그렇게 그녀를 강하게 변화시켰고 그 덕분에 난 그 지옥 같은 티베이 감옥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종식된 코로나 덕택인지 식당은 밖으로 대기줄이 만들어질 정도로 손님들로 붐볐다. 하지만 3년이 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난 브레드 영사를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

여전히 푸짐한 체구에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인상의 그도 나를 바로 알아봤다.

그는 말없이 나를 힘껏 안아줬다. 아주 오랜만에 형님을 만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난 면회가 불허된 상태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브레드의 접견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브레드 영사와 나의 접견이 있는 날이면 시설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간첩혐의'라는 원체 예민한 사안인 데다 내가 수용소 시설 내 유일한 미국 국적자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접견은 면회실이 아닌 교도관들이 사용하는 널찍한 강당에서 이루어졌다. 브레드는 올 때마다 다른 나라 영사들과는 달리 밑의 직원들을 줄줄이 달고 왔기 때문이다. 이에 질 세라 중국 측에서도 수용소 소장, 공안, 안전국, 외사부 등에서 많은 인원들이 나왔고 강당 뒤편에 앉아 우리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빠짐없이 적어가며 모니터링했다.


이젠 기싸움이 필요 없어진 브레드는 그날은 단출히 사모님만 데리고 식당에 왔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에고, 그 고생은 하고 왔는데.... 아무튼 힘내세요"


접견 때마다 답답한 상황에 늘 미안해하며 응원을 해 주던 그가 오늘도 다시 날 응원해 준다.

브레드 영사는 사건 얼마 후 아내가 더 이상 중국에 머무를 수 없게 되자 아내와 막내가 미국까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정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접견까지 불허되자 어떻게 던 외부와 고립되어 있던 나에게 가족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전화, 영상 등 갖은 방법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백인이지만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한 적도 있어 한국어 실력이 유창했다. 그리고 사모님도 한국인이고 마침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우리 아내와 죽이 잘 맞았다.

우연히 브레드 영사의 본가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고 또 브래드 영사가 마침내 중국 주재근무를 마치고 본가로 돌아와서 오늘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맛있는데… 왜 입맛에 잘 안 맞아요?"


내가 먹는 게 원체 시원치 않아 보였는지 브레드 영사가 물어온다.

사실 나는 순두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의 약속 장소는 내가 잡았다. 아직도 음식냄새에 곧잘 구역질이 나와 일부러 그나마 냄새가 덜한 순두부로 메뉴를 정했는데 먹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그날 아내와 나는 식사 후 브레드 영사 부부와 자리를 옮겨 가며 긴 수다를 즐겼다.

그리고 커피숍에서는 오랜만에 아내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브레드 영사 사모님과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 씬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나 역시 브레드 영사의 학창 시절 그리고 결혼 스토리 등 평범하고도 잡다한 일상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였다. 의식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왠지 그날 대화에서 난 중국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고마웠다'는 말로 3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었고 브레드 영사 역시 '정말 고생했다'는 말로 그 시간을 가만히 덮어줬다.


"일단 피지로 갑니다! 빨리 건강해져서 놀러 오세요!"


정년을 앞둔 브레드 영사는 마지막 임기를 저 멀리 태평양 섬나라에서 마치게 됐다. 코로나는 끝났지만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점점 더 흙탕 밭 싸움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다. 중국이 태평양 도서국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자 미국 측에서도 이를 견제하기 위해 30년 만에 솔로몬 제도에 대사관을 재 개설했고 브레드는 또 새로운 외교전쟁터가 된 그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물론이죠, 와이프랑 함께 꼭 놀러 갈게요"


브레드 영사는 못내 아쉬운 듯 두툼한 손으로 내 손을 한참 동안 꼭 잡아주고 떠났다. 그의 '피지'로의 초청에 흔쾌히, 호케하게 대답은 했지만 4년이라는 그의 임기 동안 과연 내가 온전한 몸으로 회복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내심 자신이 없었다.


주자창에는 해변가에서 밀려온 제법 차가운 바다 바람이 불고 있었고 순간 나는 잊어 버렸던 기억속에서 또 다른 약속을 떠올렸다.



티베이 감옥으로 처음 옮겨져 입관대에서 생고생할때 만났던 북한 자강도 출신 삼총사.

그들 중 리더 격인 삼십 대 중반 명철이는 입관대 첫날부터 늘 내 옆에 붙어 날 보살펴줬다.


“형님 놔두세요, 저 놈들 시키면 됩니다, 걍 쉬시라요”


이불 정리도 설거지도 하여간 내가 뭐든 하지 못하게 말렸다.

그저 말이 통하는 동포이고 연장자라는 이유로 녀석은 살갑게 ‘형님! 형님!’ 하며 틈만 나며 미국,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날 따랐다.

아내에게 감옥으로 첫 영치금이 들어오고 난 그간의 고마움에 대한 보답도 하고 보나마나 빈털터리 신세일 그들이 걱정되어 물품 주문서를 명철이에게 건넸다.


“니들 꼭 필요한 것들 주문해! 휴지처럼 꼭 필요한 것들은 넉넉히 사 가지고 가... 또 없어서 지난번처럼 망신당하지 말고 알았지”


휴지가 없어 화장실을 제대로 못 가던 한 동네 동생을 위해 휴지를 훔치다 그만 딱 걸려버렸다. 휴지는 떨어졌고 매번 계속해 빌려 달라는 것도 눈치가 보이자 그냥 옆자리 한족놈 것을 슬쩍해 버린 것이다.

자기도 넉넉치 못한데 도둑까지 맞았으니 한족 녀석은 길길이 날 뛰었다. 조선 거지새끼들 운운하며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을까 봐 일부러 중국 감옥에 왔다며 한참 동안 명철이에게 쌍욕을 퍼부어 됐다. 하지만 명철이는 이외로 담담했다.


“까마귀 같은 새끼! 꼴랑 휴지 한통에 생 지랄이구만 “


어차피 중국어는 전혀 못 알아듣고 또 말을 안 했지만 절도가 주업인 듯한 명철이는 이런 상황에 꽤 내공이 쌓인 듯 보였다.

서로 돌아가며 눈치를 보던 중, 삼총사의 막내인 외자 이름 '솔'이가 물어온다.


“아저씨 정말 사도 됩네까?”


“응, 사도 돼, 200위안까지 된다니까, 계산해서 200위안어치 주문해 “


다른 수감자들은 한 달에 400위안인데 난 200위안까지 밖에 안된다고 했다.

난 왜 내 명찰 색깔이 일반 수감자들과 다른 고동색인지 그때 알았다.

흑사회 그러니까 조직폭력단체 같은 공산당이 엄중하게 여기는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은 징벌적 차원에서 영치금 사용 한도를 낮추고 명찰도 고동색으로 구분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외국인 죄수인 나를 그 안에 포함시킨 이유는 아직도 궁금할 따름이다.


휴지 9통, 치약 6개, 비누 6개, 빨랫비누 6개….


서로 공범들이라 입관대를 떠나면 다른 대대로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녀석들은 모든 물건 개수를 3의 배수로 주문했다. 먹을 것 하나 없이 꼭 필요한 생필품만 샀는데도 가격도 가격이고 삼인분이다 보니 금방 한도액까지 차올랐다.

명철이가 미안한 듯 쭈뼛쭈뼛 대며 주문서를 내놓는다.

총 198위안이었다. 2위안짜리 물품은 없으니 꽉 채운 거나 마찬가지였다.


“형님 정말 괜찮겠어요? “

“걱정마. 난 영치금 앞으로 계속 들어올테니 니들이나 잘 버터”


아무 말없이 내 손의 주문서를 다시 한번 훑어보던 명철이가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을 뚝 뚝 흘린다.


“죄송합니다. 형님

저희 같이 염치없는 꽃제비 새끼들 만나 형님 좋아하는 라면 한 그릇도 못 사 드시고 …


목이 메는지 명철이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훌쩍훌쩍 댄다.

내가 영치금이 들어오기 이전에 컵라면을 먹고 있던 다른 죄수를 보며 ‘”라면 먹어본 지가 일 년이 넘었네”라고 무심히 했던 말이 아마도 녀석의 마음에 걸렸나 보다.


‘10년병 인민군이 왜 이래,

나야 돈 있는데 이번 달 못 먹으면 뭐 다음 달에 사 먹으면 되지 뭐”


난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명철이가 그렇게 입에 달고 다니던 ‘10년병 인민군’ 얘기를 꺼냈고 다행히 녀석은 눈물을 훔치며 다시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더 격인 명철이와 한 동네 동생 솔이 그리고 이종사촌 조카뻘이라는 광수까지 이렇게 세명은 2년 전 국경을 넘어 중국 조선족 자치현인 장백현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백산시로 가기 위해 오토바이를 훔쳤다. 그로 인해 절도죄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장백현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이곳 티베이로 이감되어 왔다.

비법 월경 죄까지 감안하더라고 고작 농가의 낡은 오토바이인데 4년이라는 형은 과해도 너무 과해 보였다.

연길 간수소에 있을 때 4만 위안인가를 훔친 죄로 들어온 한족 절도범이 있었는데 피해를 배상해주고 고작 1년 3개월인가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녀석은 변호사를 있었지만 말이다.

명철이 일행은 자기 동네에서 살다 중국으로 탈북해, 당시 한족 노인네와 살림을 차린 아줌마가 좋은(?) 일거리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오자 서둘러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중국 국경 바로 맞은편 동네에서 30년 넘게 살아온 명철이에게 국경을 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주변 지리와 국경수비대의 동선을 훤하게 꿰고 있고 또 인민군에서 장기간 복무한 그는 날쌔고 깡도 있어 뭍이면 뭍, 강이면 강으로 다 월경이 가능했다.

10년 동안 그것도 고난의 행군 시절, 인민군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와 보니 아무런 혜택도 없고 일을 해도 배급으로는 노모와 아내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 밥 먹이고 살기에도 팍팍했다고 한다. 쌀은 떨어지기 일쑤였고 한 달에 강냉이(옥수수) 죽으로 때워야 하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다고 한다.


"인민군에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요. 우리 북조선 꼬락서니 말이에요.

10년 동안 휴가라고는 딱 한번 나왔는데 왜 나왔는지 아세요?

강원도 휴전선 앞 전방부대에서 복무했는데 하도 못 먹으니까 영양실조 걸려 죽는 놈, 산에서 아무거나 캐 먹다 병 걸려 죽는 놈, 나중에는 남한으로 도망가는 놈 까지, 하여간 별 놈이 다 생기더라고요.

아, 그 남쪽으로 도망간 놈은 나중에 남한 방송에서 그러던데 어느 대학 지리학교수가 돼 잘 먹고 잘 산다고 …아무튼 먹을 것이 너무 없으니까 부대에서 저 보고 고향에 가서 씨감자를 가져오라는 거예요. 저희 고향 자강도와 강원도 기후가 비슷해 한번 심어 보겠다고, 그래서 감자 가져올 배낭을 찾았는데 군대에 배낭은커녕 제대로 된 포대기 하나 없는 거 있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빈손 거지꼴로 기차를 타고 자강도로 올라오는데 중간에 기차가 딱 멈추는 거예요.

그때는 전기도 잘 끊기고 또 한 번 끊기면 며칠이고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는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는데…

그만 기차에 타고 있던 여자 군관 하나가 죽은 거예요.

왠지 아세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굶어 죽은 거예요! 굶어 죽은 거!

며칠째 시골에서 기차가 못 움직이니까 다른 승객들은 주변 농가에 가서 구걸하고 동냥 받아 어떻게 던 기차를 고칠 때까지 견뎠는데 이 여군관은 자존심 때문에 그 짓도 못하고 그냥 배 곪아 굶어 죽은 거죠.

그때 내가 알아봤죠. 이 김 씨 집안 나라 꼬락서니가 어떻게 될지 …"


아무튼 명철이의 그때 예상대로 나라 꼴이 갈수록 힘들어지자 배급 양도 점점 줄어 갔고 공산당도 인민이 그냥 굶어 죽게 할 수는 없으니까 장마당 장사도 눈감아 주고 주변 땅을 개간해 개인적으로 농사를 짓는 것도 모른 체 해주었다고 한다.

농번기 때면 직장에 안 나와도 다들 그냥 그러려니 했다고 한다.

명철이네도 육십 넘은 노모는 뒷산을 개간해 농사에만 전념했고 아내는 멀리 혜산까지 다니며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중 노모의 혀에 원인모를 혹이 생기고 아내는 뜻하지 않는 두 째를 가지고 되자 다급하진 명철이는 뒷돈을 주고 다니던 집단 공장에는 이름만 걸어 둔 채, 국경을 오가는 풀타임 밀수 및 절도꾼으로 변신했다. 다행히 살림은 조금씩은 나아져 갔고 그러던 중 중국에서 ‘좋은 일거리’가 들어온 거다.

명철이는어머님 치료비에 둘째 문제까지 한 번에 해결이 가능한 이 건수를 위해 팀까지 구성해 국경을 넘었지만 북한에서 넘어오는 좀도둑들에게 당 할 만큼 당해 이름 갈고 있던 장백현의 조선족 주민들에 의해 ‘좋은 일거리’는 시도도 못해보고 어이없게 가는 길목에서 잡히고 만 것이다.

원래 장백현에서 백산시까지 도보를 이동하려던 계획이었던 삼총사는 농가에 서 있는 오토바이를 보고는 계획을 급 수정한다.

오토바이를 훔쳐 밤에만 이동하고 낮에는 숲 속에 숨어 잠을 잔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훔친 오토바이가 원체 낡아 고장이 나고 또 한 대는 기름마저 떨어지자 시간만 허비하고 얼마 이동도 못한 꼴이 되고 만다.

삼총사는 하는 수 없이 인근 농가에서 또 다른 오토바이들을 훔쳐 냈지만 이미 새벽 동이 터 오르고 있을 때였다.

어쩔 수 없이 오토바이들을 숲 속에 숨기고 일단 잠을 자던 중, 이미 첫 번째 오토바이 절도 신고가 들어와 현을 샅샅이 뒤지던 공안들에 의해 딱 걸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삼총사는 운도 없이 중간에 두고 온 고장 난 오토바이들까지 총 6대의 오토바이 절도죄로 기소되고 만다.

총 절도액이 3만 6천 위안이다. 원체 오래된 구형이라 가격 책정이 정확히 안되자 공안 마음대로 그냥 한대당 6천 위안씩 계산한 거라고 한다. 변호사 없이 진행된 재판에서 비법 월경죄까지 더 해져 3명 각각에게 징역 4년씩이 떨어졌고 재판 소식을 알 길이 없는 만삯의 명철이 아내는 북조선에서 그저 무작정 그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게 됐다. 소식 한자 전할 길 없는 명철이의 마음도 애가 많이 타는 듯하다.


“4년을 어떻게 무작정 기다리겠어요. 분명 다른 남자 만나겠죠.

제 잘못이니 나중에 아들놈 만이라도 데리고 와야죠 …뱃속에 둘째는 지웠을 것 같고….”


반반한 얼굴의 아내 자랑에 또 그 아내에게 은근히 추파를 던지던 동네 국경 보위대 요원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던 명철이가 점점 자신을 잃어 가는 듯했다.

드디어 입관대 훈련이 끝나고 대대 배정을 받는 날이었다.

그냥 두라는 데도 내 짐을 꽁꽁 싸주던 명철이가 걱정스러운 듯 내게 신신당부를 한다.


“형님 가시면 꼭 혈압약 달라고 하세요!

말 만 그렇지 저 까마귀 새끼들 미국 사람한테는 우리 한테처럼 함부로 못 할 거예요.

중국이나 북조선이나 똑같죠 뭐. 허풍만 쳐 대줄 알지, 싸울 배짱도 없으면 서리...

힘들어도 잘 참고 견디시라요"


솔이는 나를 위해 부랴 부랴 어디선가 반쯤 깨어진 플라스틱 밥그릇과 색이 바랜 일회용 숟가락을 주워 왔다.


“아저씨 8대대 발령받으면 작업장이랑 숙소에서 사용하는 식기가 따로 있어야 한데요”

식기뿐 아니라 제대로 준비 못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하지만 어찌하랴! 나는 명철이가 들기 좋게 싸준 간소한 봇짐을 들쳐 멘다.


“고맙다 솔이야!

너희들도 모두 가서 잘 견디고… 살아 있으면 또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 “


작별 인사를 나누고 명철이가 부탁한 전화번호 쪽지를 건네주었다.


“형님 제가 어떻게 하던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라면은 못 사드리더라도 강냉이 국수 한 접시라도 꼭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아무쪼록 건강하시라요”


10년 병 인민군 녀석의 눈시울이 또 벌겋게 부어오른다. 내 중국번호는 없어 진지 오래일 테고 아내도 미국으로 갔으니 중국번호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몰라 나는 고민끝에 중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지인의 식당 번호를 그에게 주었다.

식당이 꽤 유명해 아무래도 세월이 가도 가장 오래 남을 것 같은 번호였기 때문이다.

명철이가 남은 형기를 이곳에서 무사히 마치고 북한 교화소를 갔다가 다시 중국으로 넘어와 내게 연락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 번호가 그때까지 남아 있어 다시 명철이의 ‘형님! 형님! ‘하는 살가운 소리를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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