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6개월 만에 외식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미국 땅을 다시 밟을 때부터 고대해 왔던 브레드 영사와의 저녁약속이라 그런지 낮부터 괜스레 들뜨고 좀처럼 없던 식욕마저 도는 것 같았다.
"여보 정말 괜찮겠어?"
아내는 아직도 내 건강 상태가 못 미더운지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면 계속 확인에 또 확인 중이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3개월째다.
LA 이모는 나를 볼 때마다 살아 있는 기적이라고 감탄에 마지않지만 나는 내 회복속도가 만족스럽지 못해 늘 조바심이 난다. 특히 혼자 고군분투하는 아내의 모습을 대할 때마다 그 조바심은 더해간다.
팬데믹쯤 시작된 아내의 갑작스러운 이 고생은 나 때문에 이젠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팬데믹 종식을 축하하는 분위기인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도 힘든 내색, 싫은 내색 한번 없이 언제나 나와 아이들을 지켜주는 아내의 든든한 모습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우리 가족의 예기치 못한 불행은 팬데믹과는 무관했다. 그저 코로나 발병과 종식까지의 3년 4개월이란 기간과 시간의 궤적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심각한 코로나에 걸려 간신히 목숨을 구했고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우한짜요!"(武漢加油·우한 힘내라), "중궈짜요!"(中國加油·중국 힘내라)
충격적 코로나 발병으로 인구 천만의 중국 우한이 난리가 났을 때 나는 중국 공안에 체포된 상태였다. 미국에서만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쳐 직장생활까지 30년 넘게 살아온 나는 그 당시에 사업차 중국에 있었다. 미중 무역 갈등으로 시작된 두 나라 간의 싸움은 순식간에 최고조에 이르렀고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계 미국인 학자와 유학생 그리고 화웨이 그룹 부회장까지 간첩죄로 엮어 넣자 시진핑 공산당 역시 맞불 작전으로 나섰다.
중국 내 미국인은 물론 미국의 우방인 캐나다, 호주 국적의 사업가, 기자 등 하여간 조금만 의심 가는 인물들은 가차 없이 체포했다.
그 와중에 미국 시민권자인 나는 로마 가톨릭 재단이 중국에 설립한 호스피스 병원의 원장으로 나와 있던 지인, 그리고 중국 내 외국인이 세운 (기독교 재단) 과학기술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아내와 함께 하루아침에 간첩혐의로 체포되고 말았다.
영문도 모른 채, 모든 면회가 불허된 구금 생활 중에 나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손님이 바로 오늘 다시 만나게 될 미국 선양 총영사관의 브레드 영사였다.
그때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처음 해준 말이 아직도 귀가에 생생하다.
"bad timing, bad luck "
그리고 그의 말처럼 미국 정부의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으로 중국 공산당의 반미 감정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달었고 나는 브레드 영사의 갖은 노력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2년을 넘게 중국 감옥에 고스란히 투옥되어 있어야만 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와는 국적이 다른 아내와 지인은 겨울이면 영화 20도가 넘게 내려가는 혹독한 중국감옥을 체험하지 않고 일찍 석방된 일이었다.
"이젠 아주 잘 걷네^^ "
펭귄처럼 조금은 뒤뚱 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휠체어에서 보행기까지 순식간에 졸업하고 자력으로 걷는 내 모습이 대견한지 아내가 칭찬을 해준다. 조수석에 나를 앉히고 늘 그래왔던 듯 자연스럽게 내 대신 운전대를 잡는 아내의 모습이 이젠 익숙하다.
참담한 시설의 그 감옥에서 내가 인내와 기도로 힘든 싸움을 이어갈 때 아내는 어린 막내를 데리고 중국과 미국을 오가며 내 옥바라지를 했다.
나는 아직도 그때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나 낯설다.
원체 겁이 많아 tv에서 조금만 무서운 장면이 나와도 두 눈을 찔끔 감고 또 고소공포증까지 있어 그 멀리 그랜드 캐넌까지 가서도 제대로 구경조차 못하고 온 아내였다. 그런 아내가 나를 그곳에서 빼내기 위해 보여주었던 행동들은 지금도 경사가 조금이라도 높은 길에 들어설라 치면 핸들을 꼭 부여잡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과는 좀처럼 매치가 안된다.
면회는 물론 서신까지 전부 차단되었던 그 당시 아내는 내가 행여나 희망을 끈을 놓을 까봐 참 많은 방법으로 나를 지지해 주었다.
간 크게 교도관의 눈을 속여 가며 책 겉표지 안쪽에 성경에서 떼어 난 로마서를 숨겨 보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반입되는 책들마저 일일이 검사하자 책갈피 가장 안쪽 부분에 깨알 같은 글씨를 딱 하나씩만 적어 편지를 만들어 보내왔다. 난 감시 카메라의 의심을 받지 않고 그 편지를 읽기 위해 이전 페이지의 글자들을 힘들게 기억해 가면 5백 페이지 넘는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아내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아.침.마.다.자.기.를. 위.해.기.도.해
애.들.은. 잘.있.어. 우.릴. 위.해. 힘.내.잘. 참.아.줘
구부리고 앉아, 제대로 쓰기도 힘든 책갈피 안쪽면에 깨알 같은 크기로 한 자 한 자 편지를 썼을 아내의 모습이 떠올라 많이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스파이 혐의에 대한 증거를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하자 중국 법원은 3번이나 열린 재판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중단하고는 6개월 넘게 휴정하곤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럴 때마다 아내는 서슬이 시퍼런 공안들의 제지를 뚫고 담당 재판장에게 다가가 거칠게 항의했다고 한다.
5년이 될지 아니면 정말 누구 말 대로 20년이 될지, 변호사도 브래드 영사도 그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던 갑갑한 상황에서 지금 생각해도 아내는 참 당당하고 용감했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미국으로 추방되어 오던 날 까지도 아내는 침착하게 잘 대응했다.
코로나로 인해 국제 항공 노선들이 당일 예약과 취소가 반복되는, 한마디로 하늘길이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아내는 단 하루라도 더 중국에 머무는 일이 없도록 금전적인 손해를 감수해 가며 내가 상하이에서 비행기를 타기 한 시간 전까지도 취소와 예약을 반복하며 미국으로 오는 나의 하늘길을 열어 주었다.
덕분에 24시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아내의 바람대로 난 지체 없이 중국을 떠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애절함과 간절함이 그렇게 그녀를 강하게 변화시켰고 그 덕분에 난 그 지옥 같은 티베이 감옥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차가 언덕길 신호등에 서자 왼쪽 고개 등성이에 커다란 종합 병원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집에서 한인 마켓과 식당 등이 모여 있는 한인업소 상권 지역으로 가려면 꼭 이 길을 지나쳐 가야 한다
"난 저 병원만 보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
아내는 늘 습관처럼 병원 모습이 눈을 들어올 때마다 같은 말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6개월 전만 해도 아내는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 나를 위해 저 병원에서 눈물과 기도로 많은 밤을 지새웠다.
돌아오긴 했지만 미국도 역시 코로나 비상 상황이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시련도 코로나처럼 좀처럼 쉬게 끝나질 않았다.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바로 대만계 반중 성향매체를 비롯한 몇 군데 언론과의 인터뷰와 작은 출판사의 청탁으로 집필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 감옥에서 상할 대로 상해버린 내 몸은 채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응급차로 실려온 저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정말 긴 잠을 잤다.
아내에게는 참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난 지금까지는 그 당시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느리게나마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 같긴 한데 아직은 희미하게 그저 아주 긴 해변가의 모래사장을 누군가와 계속 걷고 있었던 같다.
의료진이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연명 치료 중단 얘기를 꺼낼 때쯤, 코로나 시작과 함께한 나의 'bad luck'이 끝나고 난 병원에서 순식간에 'lucky guy'로 불리게 됐다.
14일 만에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리고 몸에 연결된 호스들을 하나 둘 차례로 떼어내며 하루가 다르게 회복해 갔다.
나 때문에 또 다른 고생길이 열린 아내에게 너무 미안해 난 당시 정말 열심히 적극적으로 재활에 안간힘을 썼다. 어떡하던 혼자서 움직여 보려다 새벽에 침대에서 떨어져 병원을 놀라게 하고 혼자서 몰래 변기까지 가 용변을 보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해 담당 간호사를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여간 나는 아내 혼자서 흘렸을 그 눈물을 조금이나마 보상해 주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병원의 만류가 있긴 했지만 3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내는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제발 눈 만이라도 뜨게 해 달라"라고 계속 기도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보기에도 부실하기 그지없는 상태인 나에게 매일매일 "함께 있어줘 고맙다"는 말로 나를 더 미안하게 만들 곤 한다.
마침내 종식된 코로나 덕택인지 식당은 밖으로 대기줄이 만들어질 정도로 손님들로 붐볐다. 하지만 2년 가까운 시간에도 불구하고 난 브레드 영사를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
여전히 푸짐한 체구에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 인상의 그도 나를 바로 알아봤다.
그는 말없이 나를 힘껏 안아줬다. 아주 오랜만에 형님을 만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난 면회가 불허된 상태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브레드의 접견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브레드 영사와 나의 접견이 있는 날이면 시설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간첩혐의'라는 원체 예민한 사안인 데다 내가 수용소 시설 내 유일한 미국 국적자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접견은 면회실이 아닌 교도관들이 사용하는 널찍한 강당에서 이루어졌다. 브레드는 올 때마다 다른 나라 영사들과는 달리 밑의 직원들을 줄줄이 달고 왔기 때문이다. 이에 질 세라 중국 측에서도 수용소 소장, 공안, 안전국, 외사부 등에서 많은 인원들이 나왔고 강당 뒤편에 앉아 우리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빠짐없이 적어가며 모니터링했다.
이젠 기싸움이 필요 없어진 브레드는 그날은 단촐히 사모님만 데리고 식당에 왔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에고, 그 고생은 하고 왔는데.... 아무튼 힘내세요"
접견 때마다 답답한 상황에 늘 미안해하며 응원을 해 주던 그가 오늘도 다시 날 응원해 준다.
브레드 영사는 사건 얼마 후 아내가 더 이상 중국에 머무를 수 없게 되자 아내와 막내가 미국까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도록 정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접견까지 불허되자 어떻게 던 외부와 고립되어 있던 나에게 가족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전화, 영상 등 갖은 방법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백인이지만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한 적도 있어 한국어 실력이 유창했다. 그리고 사모님도 한국인이고 마침 독실한 기독교인이라 우리 아내와 죽이 잘 맞았다.
우연히 브레드 영사의 본가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고 또 브래드 영사가 마침내 중국 주재근무를 마치고 본가로 돌아와서 오늘의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맛있는데… 왜 입맛에 잘 안 맞아요?"
내가 먹는 게 원체 시원치 않아 보였는지 브레드 영사가 물어온다.
사실 나는 순두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의 약속 장소는 내가 잡았다. 아직도 음식냄새에 곧잘 구역질이 나와 일부러 그나마 냄새가 덜한 순두부로 메뉴를 정했는데 먹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나는 운 좋게 다시 깨어나긴 했지만 사실 적지 않은 데미지를 입었다.
일단 신장 양쪽이 모두 영구적으로 기능을 잃어 일주일에 3일은 꼭 투석을 해야 만이 살 수 있다. 아마 잦은 구역질은 이 투석 때문인 것 같다. 심장 역시 많은 근육손실로 이전처럼 빨리 걷거나 뛰는 것은 어렵다.
담당의들은 상태가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고 이 상태를 잘 유지하거나 순서가 와 장기 이식을 받는 수밖에 없다고 솔직히 말해 주었다.
장기간 혼수상태로 있어 그런지 뇌에도 분명 영향이 간 것 같다. 신경내과에서 요구하는 모든 검사를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정말 기억 안 나? 같이 갔었잖아'
아내가 가끔씩 떠올리는 어떤 추억들이 내게는 거짓말처럼 도통 기억조차 없다.
어리둥절하는 내 모습에 아내의 심려가 더해지는 것 같아 기억이 안 나도 아는 척 대충 얼버무려 보기도 했지만 눈치 빠른 아내를 속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참 얄궂게도 내 부분적 기억상실은 내 바람과는 정반대 경향으로 그 증세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아내와의 좋은 추억은 점점 더 잊히는데 중국 감옥에서의 그 우울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왠지 더 또렷해지는 것만 같았다.
204호, 그 낡고 작은 방 그리고 마치 그곳에 너무 오래 있어 방과 함께 낡아 버린 뜻 한 수감자들, 그 10명의 이름이 아직도 모두 기억난다.
왕 경관에게 전기봉으로 두들겨 맞던 날의 축축하던 땅바닥의 촉감이 또 문득문득 감옥동기 탈북자 경철이가 흙바닥에서 주워 와 나누어 먹었던 동파육 한 점의 맛까지 생생히 생각난다.
투석을 하지 않는 날은 집 근처 공원을 1시간쯤 혼자 천천히 걷는데 아무 생각 없이 흥얼거리는 내 소리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이! 얼! 싼! 이! 얼! 싼!
메이요~ 꽁산당~ 메이요~ 씬 중궈
매일 새벽 강제노동장으로 행진해 가며 부르던 공산당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잘 나가는 신 중국은 결코 없었을 거라는 내용의 공산당 ‘자화자찬가'다.
몸이 가난을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던데 어쩌면 내 정신은 아직도 감옥 담벼락을 못 넘고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날 아내와 나는 식사 후 브레드 영사 부부와 자리를 옮겨 가며 긴 수다를 즐겼다.
그리고 커피숍에서는 오랜만에 아내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브레드 영사 사모님과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 씬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나 역시 브레드 영사의 학창 시절 그리고 결혼 스토리 등 평범하고도 잡다한 일상을 화제로 대화를 나누였다. 의식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왠지 그날 대화에서 난 중국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저 '고마웠다'는 말로 2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었고 브레드 영사 역시 '정말 고생했다'는 말로 그 시간을 가만히 덮어줬다.
"일단 피지로 갑니다! 빨리 건강해져서 놀러 오세요!"
정년을 앞둔 브레드 영사는 마지막 임기를 저 멀리 태평양 섬나라에서 마치게 됐다. 코로나는 끝났지만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점점 더 흙탕 밭 싸움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다. 중국이 태평양 도서국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자 미국 측에서도 이를 견제하기 위해 30년 만에 솔로몬 제도에 대사관을 재 개설했고 브레드는 또 새로운 외교전쟁터가 된 그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물론이죠, 와이프 랑 함께 꼭 놀러 갈게요"
브레드 영사는 못내 아쉬운 듯 두툼한 손으로 내 손을 한참 동안 꼭 잡아주고 떠났다. 그의 '피지'로의 초청에 흔쾌히, 호케 하게 대답은 했지만 '4년이라는 그의 임기 동안 과연 내가 온전한 몸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내심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