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들과의 우연한 패키지 여행

노인의 기품

by duke j

(2023.10.8일 기록)

16명이 참여한 나오시마 여행 동반자 중 10명이 단체로 예약한 할아버지들이란 소릴 가이드에게 듣자마자 '아, 이번엔 망했구나' 싶었다. 늙어갈수록 혼자하는 계획없는 여행이 힘들어져 오랜만에 선택한 패키지 여행이었는데 더늙은 할아버지들 10명과 같이해야 한다는건 이미 그림이 뻔했다. 먼저 대놓고 나이, 사는곳, 직업, 고향을 묻고 같이 온 저 여자와는 먼 관계냐고 물을 터였다. 그간 처와 같이 해오던 대답과는 달리 이번엔 불륜관계가 아니라 며칠전 결혼한 신혼부부 사이라고 말해볼까 미리 궁리도 해봤다. 근데 이 할아버지들이 예상 밖으로 상당히 독특했다. 서로 놀리고 하대하다 때론 존대도 하는 걸로 봐선 한두살 터울 동류집단에 속한 노인들 같긴 했는데 적어도 10년에서 어쩜 20년까지도 차이날 듯한 중년부부의 사생활 영역엔 아예 선을 긋고 넘어오질 않았다. 내가 들어도 웃겼던 할배개그에도 "야 그거 3년전 버전이잖아" 라며 서로를 견제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도 명확한 규율과 배려가 그 집단을 조정하고 있다는 느낌만은 확실했다. 나이 때문이었을지 편해 보이던 일어 뿐 아니라 가끔 나오는 능숙한 영어에도 보따리 장사꾼들의 얄팍함 같은건 느껴지지 않았다. 더더욱 놀랄만한 건 필요한 말 외엔 쓸데없는 소음을 전혀 내지 않는다는 거였다. 필요한 말이란건 "너 몇호야? 일단 알고는 있어야지..(이따 술한잔 하자고 불러내려면)" 같은 필수적인 대화인 거고 한두살 터울의 서로간 호칭에도 내가 경멸해 마지않는 변두리 조폭들 사이의 "형님"이란 존칭은 아예 없었다. 형이면 형이지 도토리들 높낮이에 머 그리 차이가 난다고 "형님" 운운인가. 호칭 얘기가 나와 더 말해 보자면 지들끼리 꼭 이교수, 최박사, 박변호사, 김원장.. 머 이런 이상한 직함들로 서로 부르며 놀고 앉아있는 늙은이들 무리가 도시 어딘가에는 항상 있다. 남은게 그 껍데기 밖에 없는 소외된 늙은이들끼리 서로서로 화이팅 해보자는 건데 내 친구놈들 중 누가 날 그런 식으로 부르면 난 "미친새끼야. 이름 불러. 여기가 공장이냐." 라고 바로 쫑코줬을 거다. 그런 류와는 전혀 격이 다른 이 할아버지들 중 한분이 딱한번 내게 말을 걸어온 적이 있었는데 하루의 자유일정을 위한 의미있는 지역 온천을 추천해 주고 선선히 물러서는 걸로 본인의 자제력을 여실히 보여줬다. 여정의 마지막 날인 오늘 가이드가 이 집단에 했던 말들에서 드디어 흐릿하게 할아버지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선생님들 일생에 남들보다 공부 못했던 기억은 아예 없지 않았냔 가이드의 질문으로 판단컨데 이 양반들 시험봐 들어가기 힘들었던 어느 옛 고등학교의 선후배 노인들이었던 거다. 근래 10여년만에 거의 처음 마주친듯한 어른다운 노인네들이었다. 우리에게 암껏도 남겨진거 없던 빈털털이 시절에 그리 이 악물고 공부를 해낸 이런 노인들 덕분에 지금 우리의 풍요가 가능해졌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 나이대 엘리트들이 다 그랬듯 일은 할만큼 충분히 해냈을테고 사회가 부여해준 지위와 영달도 한껏 누렸던 할아버지들이었다는 게 그들의 태도에서 드러났다. 수십년간 서로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다 지켜본 엇비슷한 사람들끼리니 그리 살가운 분위기 속에서도 서로간의 존중과 예의가 그들 안에 가득했던 거다. 이게 상식인 건데 그간 상식적인 어른들과 마주칠때 놀라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혼자 생각해 온 내가 비상식적이었던 건지.. 다시 달리 생각해 볼 계기를 만들어준 떼거리 노인들과는 오늘 영영 헤어졌다. 돌아온 나라에서 그사이 벌어졌던 일들을 마주하고 보니 한때는 이런 선배들이 세상의 근거를 튼튼히 해주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더 커진다. 할배들, 어쨌든 오늘 댁들에 모두 안전히 잘 귀가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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