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때 다 배운거지.
(2023.1.18일 기록)
20대 후반 첫 직장이던 삼일회계법인에서 세계적인 다국적 생활용품 제조회사의 외부감사 업무에 스텝으로 참여한 바있다. 그회사 부사장 직함을 갖고 아시아퍼시픽 영업을 총괄하던 중년의 대학선배는 회계사 초년 후배에게 깍듯이 존대를 해줬는데 그 겸손한 태도에도 웃사람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았다. 그가 승승장구하고 있는 이유를 같이 근무하는 실무 회계부장에게 슬몃 물어보니 매우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원인 중 하나라고 답해줬다. 앞선 몇번의 대면으로 다소 살얼음이 녹은후 내가 그의 가정사에 대해서도 물었다. "와이프는 일을 하시나요?" 사회 초년생이던 나는 아내라는 평어보단 주위에서 너무 흔히 들리던 와이프란 단어를 사용하는 편이 더 공손한 표현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그 부사장 선배가 빙긋 웃어 보이며 대답해줬다. "제 '처'는 밖에서 일은 안하고 집안 일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배우자를 와이프네 하는 우스운 말로 부르지 않고 '처'라 칭한 그의 단어 선택이 무척 정갈해 보였다.
몇해전 시골에 집을 지어놓은 후 전원주택을 소재로 하는 티비 프로그램들로부터 촬영이 가능하겠냐는 문의를 가끔 받곤 했다. 집만 찍는다면 문제 없겠으나 사람까지 등장해 이야길 만들어내야 한다면 나는 당연히 대상이 아니라고 미리 얘기를 해뒀음에도 불구하고 한번은 pd와 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시골집에 찾아와 굳이 나와 인터뷰하는 동영상을 떠간 적이 있었다.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방송작가 명함을 건낸 여자가 이리 물어왔다. "아내분은 이집에 자주 오시나요?" 카메라가 돌고 있는 중이었지만 내가 정색하고 용어를 지적했다. "아내분이란 말이 누가 만든 조어인진 모르겠지만 남의 여자 배우자를 높여 부르려면 '부인'이란 깔끔한 존칭이 있는데 왜 요즘 연예인들은 다 남편분, 아내분 그런 말들을 어색하게 만들어 쓰죠? 남의 남편 높여 부를 때도 '부군'이라는 존칭을 쓰면 간결하고 좋을텐데요."
요즘 어디서든 흘러 넘치는 과한 존칭들을 듣고 있으려면 좀 웃긴다. 연예기획사 같은데서 만들어낸 듯한 조어 중 하나로 "팬분들"이란 말이 있다. 복수의 팬덤을 높여 부르려다 보니 "팬님들"이라 해보다가 "팬분들"이 된 건지. 나이든 연예인들이나 식당 차려 돈벌었단 사업가 같은 류도 이젠 다 "선생님"으로 불리고 동네의 가게 주인들은 대충 다 "사장님"이고 그 가게에서 일돕는 아주머니들 중 몇몇은 우릴 배아파 낳아준 친모와 동격으로 "어머니"로 불리기까지 하고 때론 어머니의 동생인 이모로 정리되기도 한다. 무작위로 사람 죽여 구속된 연쇄살인 피의자에게조차 방송 패널이란 사람들이 예의 차린답시고 이분 저분이라 불러주는 일도 허다하다. 정말 이게 머지 싶다.
아직 나이 어린 아들 둘과는 남을 부르는 호칭과 높여부르는 존칭에 대해 자주 논의한다. 상대를 존중하더라도 과하게 머리 숙이고 과하게 높여 부르지 말라고 당부한다. 자신보다 남을 더 우선시할 순 없으니 자기를 낮추려는 사람이 진심으로 남을 존중할순 없는 거다. 적어도 아들이 불러주는 아버지란 숭고한 호칭 만큼은 동네 아저씨들하고 공유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고 아이들에게 당부해 말해두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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