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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후기 및 리뷰

삶을 바꾸는, 잊혀지지 않는 단 한번의 사랑

by Just Be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나의 발견, 삶의 전환


어느 계절, 아이오와의 끝없는 옥수수밭에 낮은 해가 지고 있습니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하루의 끝, 멍하니 부엌 창문을 열었을 때 미지근한 바람 한 줄기가 얼굴을 스치고, 그 바람이 정말 오래도록 기억 속 어딘가를 흔듭니다.


그런 밤, 프란체스카처럼 우리도 문득 궁금해집니다. “나는 언제부터 내가 아니었을까?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 이름을 거듭 쌓으며 점점 사라진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사랑’이란, 어쩌면 너무 흔해서, 그래서 더욱 애틋한 감정의 한복판에서 관객을 기다립니다.


이 작품은 뜨거운 환상이나 드라마틱한 폭발 대신, 매일의 평범함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한 사람이, 다시 ‘나’를 찾아가는 작고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스스로 묻어두었던 자신의 오래된 소원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게 됩니다.


이 작품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설렘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로 살아가는 용기’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천천히 곱씹게 만듭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만나기 전과 후, 그녀의 세상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지만 완전히 달라집니다.


네 날이라는 아주 짧은 만남이 평생을 버티게 한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저 소설 같은 상상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삶 어딘가에서 이미 한 번쯤 경험했거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진실임을 이 무대는 보여줍니다.


오늘 이 밤, 이 리뷰를 읽는 우리 모두, 스스로의 이름을 조금 더 다정하게 불러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옅은 그림자 속에 잊힌 채로 남아 있던 당신의 이야기와 나의 이야기가, 이제 무대와 객석을 사이에 두고 잔잔하게 울릴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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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줄거리 요약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1960년대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의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와 오랜 시간 가족과 함께 살아온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아이들 곁에서 ‘엄마’이자 ‘아내’라는 이름으로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잔잔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젊은 시절의 꿈과 미묘한 그리움이 조용히 쌓여가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이들이 박람회로 떠나고, 며칠간 집에 혼자 남게 된 프란체스카. 바로 그때, 취재차 마을을 찾아온 사진작가 로버트가 우연처럼 그녀의 집을 방문합니다.


사소한 부탁에서 시작된 이 만남은, 예상치 못한 대화와 함께 두 사람 모두에게 천천히 잊지 못할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와의 시간 속에서, 한때 자신이 간직했던 자유롭고 생생한 감정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고, 로버트 역시 프란체스카의 다정함과 따스한 시선에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됩니다.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지만, 현실과 책임, 그리고 각자 지켜야 할 사랑 때문에 쉬이 한 걸음 더 내딛지 못합니다. 짧지만 진실된 만남 속에서,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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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나를 다시 만나며


프란체스카의 일상은 겉으로 보기에 그저 평온해 보입니다. 아이오와의 아침 햇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부엌, 한 번도 변하지 않는 가족의 일상. 하지만 그 잔잔한 표면 아래에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긴 외로움과, 오래도록 눌러왔던 내면의 목소리가 숨어 있습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지?”라는 질문조차 오래전에 입술에 묻힌 채, ‘좋은 엄마’, ‘성실한 아내’의 역할만이 그녀의 세계가 되어버린 시간이었죠. 이따금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을 바라보다가, 한참이나 넋을 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로버트의 등장은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우연일지 모르지만, 프란체스카에게는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로버트는 특별히 대단한 말을 하거나 화려한 제스처를 쓰지 않습니다.


로버트는 상대방의 외면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프란체스카 안에 숨어 있던 소녀의 꿈과 젊은 날의 기억, 말하지 못한 슬픔까지도 하나하나 깊이 응시합니다. 그는 그저 진심을 다해 듣고, 마음을 담아 바라보고, 한 번도 누구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합니다.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했나요?"

이 한마디가, 프란체스카 안에 긴 시간 잠들어 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깨어나게 합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소녀 시절, 푸른 하늘 아래 그림을 그리고, 다른 언어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던 시간들, 여전히 그녀 안에 살아 있던 감각들이 조심스럽게 스며나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따뜻하면서도 슬픈 장면 중 하나는 프란체스카가 부엌에서 고요히 창밖을 바라보는 그 짧은 시간입니다.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을 때, 그녀는 잠시 남편도, 아이들도 아닌 오롯이 ‘프란체스카’로 숨을 쉽니다.


아침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그 평범한 순간에도, “나는 누구지?”라는 조용한 혼잣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로버트와의 만남은 그녀로 하여금 그 질문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 답하게 만듭니다. “나는 그저 누군가의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일 수 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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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의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한순간에 폭풍처럼 다가올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잠복해 있던 결핍이 상대의 한 마디, 한 시선에 의해 조용히 깨어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와 나누는 짧은 대화와 눈빛, 함께 브리지로 향하는 트럭 안의 침묵, 그리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 손을 멈추는 미세한 움직임까지. 이 모든 것이 그녀가 서서히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신호가 됩니다.


사실 프란체스카의 변화는 화려하지도, 누구의 눈에 확연히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그저 일상 속에서, 아주 작은 의심과 설렘이 반복되면서, 그녀는 조금씩 다시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불러보게 됩니다.


아이들이 떠난 빈집에서 들리는 시계소리, 노을빛이 길게 깔린 창밖 풍경, 로버트의 진지한 얼굴을 마주하며 한순간 느껴지는 설렘. 모두가 그녀가 잃어버린 자신의 일부를 되찾는 과정의 풍경입니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웃어봤지?”라는 생각이, 처음엔 아련한 슬픔으로, 나중엔 미소와 눈물로 바뀌어 갑니다.


이 뮤지컬은 프란체스카가 결국 ‘누군가의 아내’와 ‘누군가의 엄마’로 돌아가더라도, 다시 예전의 자신의 모습 그대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제는 좀 더 자신에 대해서 이해하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람으로 돌아갔음을 이야기합니다.


로버트와의 네 날은 그녀 안에 평생 꺼지지 않을 불씨를 남겼고, 이제는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하는 법, 아주 사소한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감정을 놓치지 않는 법을 배워나갑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이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이 작품을 보고 나서 가장 오래 간직하게 되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외로운 여인의 불륜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입체적인 작품입니다. 우리 각자가 잊고 살아가는 내면의 풍경,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용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그 모든 것을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무대 위에 그려 보여줍니다. 이 긴 여행 끝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나를 사랑했지?”라는, 아주 다정하면서도 묵직한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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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세계에 대한 존중, 사랑을 완성하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의 사랑은 겉으로 드러내는 불꽃이 아닙니다. 그들의 관계는 격정의 환호성이 아닌, 매 순간 조용히 삭여낸 갈등과 배려, 깊은 이해와 성숙의 누적으로 완성됩니다.


이 작품이 관객의 마음을 강하게 붙드는 지점은, 두 사람이 결국 '붙잡지 않는 사랑'을 선택하는 그 담담한 결단의 미학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존중하는 일임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무대 위에서 한없이 조용하게, 그러나 단단히 증명합니다.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역시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의 네 사람의 침묵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먼저 드러내지 않고, 누구도 손을 뻗지 않습니다. 이 침묵 속에서, 관객은 오히려 가장 강렬한 고백을 듣게 됩니다.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의 곁에 머물고 싶었지만, 그녀의 가족과 삶, 그녀가 지키고 싶은 세계까지도 사랑했기에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심합니다. 프란체스카 역시 로버트를 사랑했지만, 자신이 이미 품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두 사람이 실제로 나누는 말보다, 그들이 애써 삼키는 눈빛과 손끝, 잠시 멈칫하는 숨결 속에서 더 많은 진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별의 순간은,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에서 가장 쓰라린 클라이맥스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이별은 슬픔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선택이, 두 사람의 사랑을 더 깊고 오래도록 남게 만드는 역설적 아름다움의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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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편지와, 프란체스카가 그 편지를 읽으며 흘리는 눈물. 이 장면은 관객의 마음을 오래도록 저미는 잔향으로 남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하지 못함으로써, 각자의 삶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빛을 남겨주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단순히 현실에 굴복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지키기 위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성숙한 사랑의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입니다.


로버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세상을 등지거나 죄책감에 시달리길 바라지 않습니다. 프란체스카 역시 자신이 사랑한 남자를 끝내 놓치더라도, 가족과 아이들, 자신이 쌓아온 삶을 존중하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이 타협과 존중의 순간은, 언뜻 보면 지나치게 현실적이지만, 사실은 사랑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차원의 아름다움임을 일깨워줍니다. 이들의 사랑을 보면, 우리는 진정한 배려와 존중, 자기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떠나지 않는 선택이, 때로는 가장 숭고한 헌신이 될 수 있음을. 사랑이란 때로는 '함께하는 것' 그 자체보다, '함께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고 넓게 남는 기억과 울림을 남길 수 있음을 이 작품은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사랑을 할 때마다 우리는 결국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오직 ‘내 마음’만을 따라가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까지도 같이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속에서 진짜 사랑의 윤리가 무엇인지를,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가장 아름답고 성숙한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관객은 그 침묵과 간절함을 따라, 사랑이란 결국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일’임을 서서히 이해하게 됩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결국 '사랑의 완성'이란, 붙잡음이 아니라 놓아줌임을, 자기 자신도, 상대방도 지키는 사랑이야말로 결국 가장 오래 살아남는 감정임을 차분히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그 이별이 아프면서도 따뜻한 위로가 되어 가슴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언젠가 스스로의 선택 앞에 섰을 때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순간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조용한 빛을 비춰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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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 자신만의 우주를 찾다


프란체스카는 결국 가족의 곁으로 돌아옵니다. 많은 사람이 이 결말을 두고 “왜 그녀는 떠나지 않았을까?” 혹은 “희생 아니었나?” 하고 아쉬워하지만, 이 뮤지컬이 전하는 삶의 깊이는 바로 그 결정 이후에 드러납니다.


프란체스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건, 결코 예전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네 날의 기적 같은 시간이 남긴 흔적 덕분에, 그녀의 일상은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작품이 인상적인 것은, 일상을 무거운 의무나 희생의 연속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로버트와의 사랑을 경험한 프란체스카는 다시 가족의 곁에서, 작은 것들에 더 귀 기울이고, 더 다정해진 시선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전 같으면 그냥 흘려보냈을 식탁 위의 대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머지와 찰리가 건네는 익살맞은 농담들. 이 모든 사소한 순간이 이전과는 다르게, 아주 소중하고 따스하게 다가옵니다.


부엌 창가에서 빛을 따라 손을 멈추고, 찬 바람에 짧게 한숨을 내쉴 때, 프란체스카는 문득 자신이 한때 얼마나 먼 곳을 꿈꾸었는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 꿈을 떠나보내거나 억누르지 않습니다.


로버트와의 네 날이 그녀의 가슴속에 작은 등불로 남아, 언젠가 외로움이 몰려오는 밤이면 그 불씨가 잔잔히 그녀를 데웁니다. “나는 분명히 사랑했고, 누군가를 깊이 그리워했고, 그 기억 덕분에 내 삶은 이전과 달라졌다.” 이 진실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다시는 건조하거나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족을 위해 남는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희생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녀는 그 안에서 자기만의 성장을 이루어냅니다. 남편 버드의 투박한 애정, 아이들이 각자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며 보여주는 작은 성장, 그 모든 일상은 이제 프란체스카에게 또 다른 사랑의 이름이 됩니다.


특히, 딸 캐롤린과의 어색하면서도 따뜻한 대화, 사춘기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미소 속에는 어쩌면 로버트와 나눴던 그 깊은 시선이 조용히 스며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누군가의 곁에 남아주는 일”이야말로, 또 한 번의 용기이자,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여운처럼 퍼집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어떻게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누군가의 곁을 지킬 수 있는지, 그리고 소박한 하루의 반복 속에서도 인생을 얼마든지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다는 용기를 건넵니다.


로버트와의 네 날의 사랑이 아주 잠깐이었더라도, 그 기억 하나로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는 것, 그리고 그 힘이야말로 진짜 인생의 기적임을 이 뮤지컬은 조용히 말해줍니다.


그래서 무대 위의 프란체스카를 바라보고 있으면, 우리 자신도 자연스럽게 삶의 가장 평범한 풍경에서 자기만의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반복되는 하루, 지루한 저녁,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서도, 한 번이라도 진짜 나였던 시간. 그 찬란한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 역시 충분히 아름답고 단단해질 수 있다는 믿음이 따뜻하게 마음을 적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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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으로 느끼는 사랑의 진동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무대는 아이오와의 평범한 시골 풍경을 담백하게 재현하면서도, 그 속에 담긴 인물들의 감정과 기억의 결을 한 겹 한 겹 섬세하게 펼쳐 보입니다.


처음에는 소박하게만 느껴지는 부엌과 작은 거실, 그 뒤편에 놓인 브리지와 농가의 풍경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내면이 확장되는 우주처럼 점차 변화합니다.


이 작품의 무대는 시대적 배경으로서 역할하는 것을 넘어, 사랑과 그리움, 존재의 흔들림이 물결치는 ‘마음의 공간’ 그 자체로 존재합니다. 특히 밤하늘을 닮은 조명과 프로젝션 효과는 무대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바꿔줍니다.


두 사람이 브리지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 혹은 부엌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는 순간, 무대는 서서히 현실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별이 쏟아지는 은하수로 변합니다.


그 변주 속에서, 일상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멀리까지 뻗어갈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관객들은 “내가 저 무대 위에 있다면 어떤 빛을 볼 수 있었을까?”라는, 자기만의 내면 여행을 시작하게 되죠.


그 무수한 장면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오래 남는 순간이 있습니다. 극 중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와 운명같은 시간을 보내고 자신을 둘러싼 알 수 없는 복잡한 갑정에 혼란스러워합니다.


로버트를 만나기 전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죠. 넘버 '널 알기 전과 후'를 통해 프란체스카는 이런 마음을 로버트에게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프란체스카의 옅은 미소와 로버트의 따뜻한 응시, 그리고 아무런 대사도 없이 이어지는 그 침묵. 이 순간이야말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깊이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관객도 배우도 그 깊은 감정에 모두 숨을 죽이고 극에 몰입하는 바로 이때,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듀엣 넘버 ‘단 한 번의 순간’이 무대를 가득 채웁니다. 두 사람의 절절한 고백과 사랑이 은은한 밤하늘 조명과 함께 울려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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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두 인물의 사랑에 대한 듀엣 넘버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아름답습니다. 마치 두 사람이 오랜 기다림 끝에 마주한 우주의 소리처럼, 관객의 심장에 직접적으로 파고듭니다. 그들에게 지금 이 순간은 사랑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현악과 피아노가 차분히 깔리고, 두 배우의 목소리는 마치 속삭임과 울음, 고백과 포옹이 한데 어우러진 듯 울려 퍼집니다. 노래가 진행될수록 객석도 숨을 죽이고, 무대와 관객 사이의 경계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사랑을 함께 목격하고, 어느새 그 감정의 진동 안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넘버가 끝나는 순간, 무대 전체는 한동안 고요에 잠깁니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관객의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누군가는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또 누군가는 아주 미세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그 여운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길고 깊게 남습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무대와 넘버는, 배경과 음악으로써의 기능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여줍니다.


사랑이란 감정이 얼마나 거대한 파동이 되어 우리 삶에 스며드는지, 그리고 한 번의 만남과 한 번의 선택이 우리 마음을 어떻게 다시 태어나게 하는지, 온몸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예술 그 자체로 느껴집니다.


극장 밖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의 순간’과 두 사람의 눈빛은 관객 각자의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잔잔히 울립니다.





다리를 건넌 뒤, 우리에게 남는 것


누구나 인생에서 크고 작은 다리를 여러 번 건너옵니다. 첫사랑에 설레던 시절, 가족과 이별하던 눈물 많은 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주저앉고 싶었던 어느 아침까지. 그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성장하고, 또 조금씩 상처를 입으면서 그 다리를 건너고 자기만의 우주를 넓혀갑니다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보고 나온 어느 저녁, 아직 마음속에는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진 마지막 피아노 음이 희미하게 맴돌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 창밖으로 스쳐가는 불빛들이 이상하게도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어쩌면 우리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이 네 날의 이야기와 은밀하게 겹쳐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사랑을 통해 “당신의 삶에도 분명히 단 한 번, 영원히 기억될 만한 빛나는 순간이 있었을 것”이라는 위로를 전하는 듯 합니다.


그것이 뜨겁고 격렬한 사랑이었든, 아주 조용한 다정함이었든, 혹은 때로는 후회로 남아버린 결정이었든, 그 모든 순간이 결국 우리의 삶을 조금 더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주었음을, 작품은 단 한 번도 가르치듯 말하지 않고, 대신 관객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파문을 남깁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사랑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대사처럼, 우리 모두의 인생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남아 있는 다리와, 그 다리 위를 건너던 순간을 잊지 말라고 다정하게 권합니다.


때로는 현실과 책임, 두려움과 사랑이 뒤섞여 가장 소중한 것을 놓아야 했던 날도 있었을 테고, 또 한편으로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기억 하나가 다시 살아갈 힘이 되어준 적도 있었겠죠.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위로는, 그 모든 찬란했던 순간과 아픈 결정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극장 문을 나서면서 우리는, “나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지?”, “내 마음속 다리는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하는 다정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건네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 한켠이 묵직해지다가도, 다시금 조용히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죠.


아마도 우리는 모두,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단 네 날의 만남이 남긴 찬란한 빛처럼, 아주 짧지만 깊었던 인연 하나쯤은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기억이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후회스럽고, 때로는 너무 아름다워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더라도, 그 모든 흔적이 모여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왠지 든든하고, 또 고맙게 느껴집니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우리 삶이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어느 저녁, “아직도 당신 안에는 반짝이는 다리가 놓여 있음을 잊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다리 위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주고, 사랑했던 모든 순간을 조심스럽게 꺼내보며, 오늘도 삶의 무게를 한 톨 더 가볍게 할 용기를 건네줍니다.


아직도 우리의 마음 한켠에 그리운 이름 하나, 잊히지 않는 순간 하나가 남아 있다면, 그건 어쩌면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인생이라는 다리 위에서, 우리는 언젠가는 누군가를 사랑했으니 후회하지 않는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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