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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냥 Jan 19. 2024

엄마와 닭장

살아가는 이야기

  어릴 적 고향 집 마당 한 귀퉁이에 닭장이 있었다. 닭이 홰치는 소리는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의 새벽 단잠을 깨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닭장 안 암탉이 방금 낳아 따끈따끈한 달걀을 엄마는 흐뭇한 표정으로 꺼내오셨다. 엄마의 손에 들려온 달걀은 가끔 밥상의 반찬으로 올라오기도 하지만 모아 두었다가 병아리로 부화시켰다. 엄마의 온갖 정성으로 잘 키워진 닭은 장날 닭집으로 팔렸고 크기가 영 신통치 않게 자란 닭은 식구의 몫으로 특별한 날에 밥상 위에 오르곤 하였다.

  닭장 관리는 엄마의 권한이 컸지만 아버지도 일정 권한이 있었다. 명절이나 생일날 특별한 날 엄마가 지목한 닭의 목을 틀어쥐는 일이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매끈해진 닭을 엄마에게 척 내어주시곤 손을 탁탁 털어내시는 것이 전부이긴 하였지만.


  그날의 사건도 처음에는 평범하게 시작되었다. 이웃집에 잠깐 다녀오겠다던 아버지를 기다리며 엄마는 바삐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밥때가 다 되도록 아버지께서 돌아오지 않자 마음이 분주해진 엄마는 더이상 기다릴 수 없는지 어린 동생들에게 아버지를 모셔오라고 재촉을 했다. 하지만 동네 어르신들과 모처럼의 술자리에 흥이 난 아버지는 아이들 발걸음을 몇 번씩이나 되돌려 엄마의 애간장을 태웠다. 계속해서 아이들만 털레털레 되돌아오자 엄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나를 불러 세웠다.

  아버지가 대신 당신이 직접 해야겠으니 나보고 도와달라시곤 뒤꼍으로 가셨다. 잠시 뒤 두 발이 묶여 꼼짝 못 하고 퍼덕거리는 닭을 번쩍 들고 와 커다란 통 안에 넣었다. 이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단숨에 닭의 모가지를 비틀었다. 그리고 꽉 잠긴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큰애야, 가마솥에서 뜨거운 물을 퍼부어라.”

  축 늘어진 닭 위에 부으라는 말이다. 겁에 질린 난 엄마가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움직이며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두 눈 질끈 감고 축 늘어져 있던 닭 위로 뜨거운 물을 쏟아붓자 엄마는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닭의 털을 벅벅 뜯어내기 시작하셨다.

  일은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되어 닭의 털을 반쯤 뜯어내고 있을 때였다. 축 늘어져 있던 닭이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엄마의 어설픈 손길에 잠깐 기절하였다가 뜨거운 물세례에 정신이 들었던가 보다. 다시 살아난 닭은 몸을 한 번 푸르르 떨고 곧장 부엌문을 지나 뒤꼍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털이 반쯤 뜯겨나간 상태로 모가지를 덜렁거리며 비틀비틀 내달리고 있었다. 기괴한 장면에 엄마와 나는 아연실색한 채 저만큼 달아나는 닭의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갑자기 엄마는 "오매야!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 닭을 쫓아 뒤꼍으로 뛰어나가며 연거푸 소리쳤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던 나는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다시 엄마의 다급한 외마디 소리를 듣고서야 간신히 뒤꼍으로 나갔으나, 차마 닭을 쫓아갈 수 없었다. 겁에 질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손가락으로 닭이 달아나는 곳의 방향만 가리킬 뿐이었다. 엄마는 허우적거리며 닭을 쫓고 닭은 잡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꽁무니를 빼는 진풍경이라니.

  등 뒤에서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아버지 저기, 저기요."

  내 손가락은 여전히 닭을 가리키고 있지만 이미 한바탕 난리를 치른 닭은 도망치다 제풀에 지쳐 몇 번 픽픽 쓰러지더니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엄마는 백지장처럼 허옇게 뜬 얼굴로 쓰러진 닭을 낚아채듯 움켜쥐고 부엌으로 돌아오다가 아버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뒤의 상황을 나는 자세히 모른다. 아버지를 향한 서슬 퍼렇던 엄마의 시선과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하시던 아버지의 모습. 왠지 그 자리에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얼른 방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간간이 들리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엄마의 칼칼한 된 발음 소리가 부엌 쪽에서 연신 들려오고 평소보다 몇 배는 시끄럽게 여닫히는 무쇠솥 뚜껑 소리가 들리는 내내, 나는 TV에 두 눈을 고정한 채 부엌 쪽의 상황은 모르쇠로 일관해버렸다. 눈치 없는 동생들만 쪽문으로 슬쩍슬쩍 부엌의 동태를 살펴보곤 하였다.

  그날 이후부터 엄마는 닭과 닭장에 관한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거칠 것 없는 여장부로 거듭나신 듯했다. 잘은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그저 엄마의 엄명에 따라 닭장을 수리하거나 아니면 닭똥을 치우는 일 외에는 닭장 출입에 제한을 받지 않았나 싶다.


  아마도 그때가 겨울 농한기였지 않았을까. 계절은 어느 때였는도 가물거리지만 뒤꼍 텃밭에 작물이 없었던 기억으로 보면 설 명절 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되는 그날의 닭 모가지 사건. 지금은 그때 아버지를 데리러 몇 번씩 동네 길을 오갔던 어린 동생이 그 시절 부모님보다 더 나이 든 모습으로 고향 집을 지키고 있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지나간 시간은 조금씩 낯설어지지만 어떤 장면은 마치 방금 일어난 일처럼 선명하다. 가끔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이끌고 엄마의 닭장 앞으로 데려간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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