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냥 Feb 22. 2024

그녀가 머물던 자리를 지나며

책 읽는 이야기

           그녀가 머물던 자리를 지나가며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고

                              

  한때 온기가 머물렀던, 지금은 냉기만 가득한 빈자리를 바라보면 여지없이 떠오르는 그녀, 나의 엄마.

  조해진 작가의 장편소설 『겨울을 지나가다』는 2023년 12월에 출간한 작품이다. 작가의 프로필을 찾아보던 중 코로나 시국에 Zoom으로 만나던 독서 모임에서 다뤘던 『빛의 호위』를 쓴 작가라는 걸 알게 됐다. 끈적이지 않는 슬픔을 다루는 작가. 적어도 나는 작가가 표현하는 슬픔의 점성이 접착제 같지 않아서 좋았다.

  『겨울을 지나가다』 또한 그런 감정으로 다가왔다. 작품 속 화자인 그녀의 고통을 지면으로 좇으며 엄마를 보내는 과정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세상의 딸 중 엄마를 보내며 담담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있다면 그 또한 기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 속 주인공일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은 ‘시간이 담긴 그릇…….’으로 시작된다. 췌장암을 앓는 엄마를 곁에서 지켜보며 그녀가 떠올린 생각이다. 조금씩 무너져가는 엄마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시간이 담긴 그릇은 채워지지 않은 채 조금씩 금이 가고 있다. 당장에라도 깨어질 듯 위태롭고 쩍쩍 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릇.

  그녀의 엄마는 칼국수를 팔아 생계를 이었다. 상호는 정미 식당. 악착같이 살아내야 할 이유가 되었던 두 딸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상호였다. 엄마가 끓여내는 칼국수엔 사람의 냄새가 가득 배어 인생살이에 허기진 이들을 배부르게 했다. 정미식당에서 손님들이 채운 건 허기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내면의 외로움을 채웠고 쓸쓸함을 채웠으며 무상함을 채웠다. 쫀득하고 뜨끈한 칼국수 한 그릇이면 헛헛했던 삶이 충만해졌다. 마치 치유의 손길처럼.

  병실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엄마는 잠꼬대처럼 자신의 엄마를 부른 뒤 흐느낀다. 내 엄마에게도 부재한 자리는 있었다. 엄마를 이제는 보낼 수밖에 없음을 알아챈 화자는 어린 아기로 돌아가 엄마 옆에 눕는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화자는 엄마가 입던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정미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앞세워 엄마가 걷던 길을 걷는다. 정미 식당 냉장고 한구석에서 발견한 김치를 발견한 화자는 엄마의 손맛을 기억해내 칼국수를 끓여 먹는다. 그리곤 무기력했던 삶을 회복해나간다. 엄마와 관계 맺었던 인연을 이어나가며 엄마의 삶을 자신의 삶 속으로 들여온다. 그리고 온전하게 엄마를 이해한다. 사람의 사는 일에 대해. 왜 사는 가에 대해.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해.


  언젠가 박상천 시인의 시집에서 「꾸역꾸역」이란 제목의 시를 읽다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시집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애도하며 하루하루 지난날을 회상하는 시 모음이다. 시의 내용은 이러했다. 김치 냉장고에 들어있는 아내가 담가두었던 김치 한 포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거기에 두고 있고 싶었으나 언제까지 거기 둘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민 끝에 딸과 함께 남은 김치를 다 털어 넣고 김치찌개를 끓이기로 한다. 아내를 떠올릴만한 것들은 비워내던 때였다. 딸과 마주한 식탁 앞에서 말없이 꾸역꾸역 김치찌개를 먹는 내내 그냥 거기에 두고 먹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든다. 아직 아내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거다.

  추억 속 그녀를 회상하는 일 또한 충분한 사랑임을 깨달은 작가는 이후 10년간 시를 쓰며 서서히 고통에서 벗어난다. 10년간 썼던 시엔 아내와 사랑했던 시간, 다투고 화해하던 시간, 기쁨과 슬픔, 환희와 고통이 녹아있었다. 사랑했던 이를 보내는 일은 고통이고 아픔의 시간이다. 조해진 작가의 『겨울을 지나가다』 속 화자의 시간처럼.


  내 엄마 역시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화자의 엄마보다도 다섯 살 어린 젊은 나이였다. 나라에서 나이 들었다고 돈을 다 준다며 용돈 받는 아이처럼 좋아하던 그 이듬해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화자가 나였다. 아픔을 절절하게 공감했고 빈자리를 어쩌지 못해 아직도 엄마 얘기를 글에 담을 수밖에 없어 엄마 곁에 누운 어린아이인 나. 그러나 이별을 잊기엔 시간만큼 특효약이 없다고 했던가. 작품 속 화자가 정미 식당을 활짝 열 듯이 나 또한 그 수렁 같던 날들에서 걸어 나와 나이 든 엄마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지나가다’의 사전적 의미는 시간이 흘러가서 그 시기에서 벗어나다로 규정된다. 슬픔의 시간을 지나고 아픔의 자리를 벗어나 새로운 계절로 들어서는 일. 소멸의 시간이었던 겨울이 지나면 소생의 시간인 봄이 찾아오듯, 우리는 이별의 시간을 맞닥뜨리고 애도의 시간을 지나며 조금씩 농익어가는 삶, 어쩌면 그것이 시간이 담기는 그릇인 인생 여정이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제비꽃 화분 사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