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모처럼 아침 햇살이 환히 내리쬐는 아침, 느지막하게 일어나 산바람 실은 공기를 한껏 들이켰다. 몽롱했던 머릿속이 개운해지고 찌뿌둥했던 몸이 가볍게 느껴진다. 두어 달 코흘리개 아이들과 서로 적응하느라 직업병 같은 몸살을 앓고 난 뒤였다. 콧바람이라도 쐬면서 기운 차리고 싶은 맘에 이른 봄부터 벼르던 한택식물원으로 무작정 출발했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중간중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초여름답게 봄빛을 벗어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로 뭉게구름이 목화꽃처럼 피어 있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초록 잎들이 제법 여물어, 바람이 지날 때마다 반짝거리며 햇빛을 끌어안고 있었다.
무심히 창밖 풍경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차는 어느덧 곤지암 IC로 들어섰다. 이어 중부고속도로로 달리다가 일죽 IC로 들어서라는 안내가 이어지자 조용히 운전에 집중하던 남편이 예정 없이 너무 먼 곳으로 나선 것 아니냐며 끝내 한마디를 한다. 재차 주소를 검색해 보았다. 분명히 용인시라고 적혀있는데 그것이 아니었나 보다.
식물원은 의외의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용인시와 안성시 분계 지점 야트막한 산자락에 위치한 식물원은 일단 너무 요란하거나 인위적이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입장료 9,000원을 지불한 뒤 입구에 비치되어있는 안내지를 펼쳐 현황을 살펴보았다. 40년 전부터 꾸준하게 개발을 해왔으며, 2003년에 임시 개장을 시작으로 일반인에게 오픈 되었다고 한다. 주요 사업으로 우리나라 자생 식물 및 희귀 멸종 위기 식물을 풍토에 맞게 관리하며 꾸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식물원 안으로 들어가니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경치가 외딴 산속에 가득 피어난 꽃길 같은 느낌이다. 계절에 맞게 봄꽃 떨어진 자리와 여름 꽃 피어나는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각각의 생김새와 향기로 진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보름달처럼 소담스러운 수국과 이제 막 꽃봉오리를 올린 초롱꽃과 산딸나무 등 눈에 익은 꽃나무가 많고 큰꽃으아리, 미치광이풀, 홀아비바람꽃 등 생소하면서도 쿡쿡 웃음이 나는 이름을 가진 야생화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야생화의 크기는 제각각이지만 비슷한 생김새가 많다. 색깔도 수수해서 언뜻 보면 눈에 잘 띄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생김생김이 앙증맞아 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자세히 바라봐주는 누군가의 정다운 시선이 느껴진 걸까. 유난히 꽃대를 흔든다. 바람 탓이겠지만 내 눈엔 교태처럼 보인다. 나도 덩달아 들꽃 닮은 미소를 마주 보냈다.
숲길 따라 산등성이 위로 얼마쯤 더 오르자 캐리커처 그림을 양옆으로 펼쳐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나이 지긋한 화가가 보였다. 이 산중에 화가가 웬일인가 싶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우리도 슬그머니 이젤 앞에 앉았다. 사진 찍히는 것도 어색해 하는 나로선 자연스럽게 자세 잡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더구나 매의 눈빛을 닮은 화가의 시선이 느껴지자 뻘쭘해져 몸이 바람풍선 마냥 움찔거린다. 애써 태연한 척 멀뚱히 앉아 있는 나와 달리 사교성 좋은 남편은 특유의 입담을 발휘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말문이 트인 화가의 화젯거리는 무척 다양했다. 식물원의 사계절에 관한 이야기며 학창 시절 운동권이었다는 이야기, 젊은 시절 연애담까지 쉴 틈이 없다. 끝없이 말을 이어가면서도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직업인과 손님으로서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가 간절했나 보다. 화가와 남편은 한 시간 가까이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이 수다를 떨었다. 여성 호르몬이 온몸을 휘감고 돌아가는 두 남정네를 지켜보는 것은 예상치 못한 즐거움이었다.
완성된 그림을 건네받았다. 캐리커처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변한 우리 모습에 한바탕 웃음을 쏟아내며 고마움을 전했다. 자리를 빠져나와 숲속 나무 그늘엔 곳곳에 벤치에 앉아있으려니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새소리와 바람결에 실려 오는 꽃향기가 몇 달간의 누적된 피로를 풀어주는 듯 노곤하다. 풀 내음 가득한 곳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은 우울했던 마음을 위로받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때론 자유로운 여행을 꿈꾼다. 여행은 일상에 지친 나를 보듬는 시간이며 또한 늘 같은 패턴의 단조로운 삶 속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낯선 곳에서 뜻밖의 인연으로 인해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또 얼마나 근사하고 멋진 일인가. 그래서 나는 무작정 떠나는 여행을 더 선호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붉게 물들어 가라앉는 석양 하늘을 느긋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