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어느 구린 날에 下

타로 길에서 만난 사람들

by 완두



세 번째 타로 수업을 마치고 난 날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같이 수업을 받는 지인이랑 홍대 거리도 걷고 커피도 마시고 그랬을 텐데, 그날은 그 지인이 결석하는 바람에 혼자였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밖으로 나오자, 차 앞에 서 있던 그 남성분이 내게 말했다.


내 차 타고 가겠어요?


'여성 대하는 걸 무척 부담스러워하는 남성'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당연히 거절했다. 나는 '남성 대하는 걸 특별히 부담스러워하는 여성'은 아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는 곳까지 전철로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죠? 내 차 타고 가다가 그쪽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드릴 테니 거기서 버스 타세요. 그게 훨씬 빠를 거요.


남의 차를 얻어 타는 일도,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좁은 공간에 같이 있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방 호의를 몇 번씩이나 거절하는 것도 미안했고, 그보다는 귀가 시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나를 그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분이 내려준다는 버스 정류장까지는 30분 정도가 소요되므로 그 30분을 견뎌 한 시간 일찍 집에 들어가자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다반사다. 무슨 일 때문인지 도로가 꽉 막혀있었다. 30분 거리가 40분이 되고 다시 60분으로 늘어났는 데도 목적지인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솔직히 중간에 내리고 싶었지만, 미안해하는 사람에게 그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더구나 이미 외곽도로에 들어선지라 그곳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집으로 가려면 2시간 30분 이상이 걸릴 상황이었다. 그냥 그 차를 타고 가는 게 가장 나아 보였으므로 울며 겨자 먹기로 차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로 상황은 이랬고, 이제부터는 내가 탄 차 내부 상황을 말하려고 한다.


그 자연인(남성분 호칭이 애매하니 그냥 자연인으로 적겠다)은 차에 타자마자 자신이 운영하는 자연건강센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공무원으로 퇴직한 뒤 어떻게 그 센터를 차리게 되었는지, 무슨 돈으로 그 땅을 구입했고 건물을 짓는 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현재 어떻게 그 센터가 운영되고 있는지, 그 자연건강센터의 지난한 역사를 수십 분 들어야 했다. 그 이야기는 내가 그곳 이용료가 얼마냐고 묻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한 번 방문하겠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 자연인이 날 상대로 영업했다는 건 절대 아니다. 자연건강센터의 좋은 기운을 내게 나눠주고 싶어 했던 그 자연인의 진심을 나는 믿는다.


자연건강센터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 다음에는 건강 강사라는 지인 이야기를 꺼냈다. 왜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지인이 어떤 특징을 지닌 사람인지는 지금도 기억난다. 썩 괜찮은 사람인데 말투가 강해서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는다는 것, 그건 그 사람 일주가 경금이라서 그렇다는 것, 강의를 잘해서 청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는 인기 강사라는 것 등이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지인의 강의라고 했다. 그 강사가 청중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내 호응까지 얻어내진 못했다. 가끔 뭘 검색하다가 잘못 들어간 중장년 카페의 번쩍번쩍하는 글귀를 음성으로 옮겨놓은 듯한 강의였다. 경금 일주를 가진 할아버지의 열띤 강의와 거기 덧붙여진 자연인의 세심한 해석은 더할 나위 없는 소음의 콜라보였다. 그걸 스테레오로 들으며 '이런 게 바로 청각 고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도로가 뚫렸다. 그런 상황이라면 10분 이내에 내가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듯싶었다. 한결 여유로운 마음으로 도로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차가 경로를 이탈했다. 도로에서 옆길로 빠져 어느 동네로 들어가는 거였다. 무척 놀랐지만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얼마 뒤 도착한 곳은 산속에 있는 한 음식점이었다. 자연인은 그 음식점 주인에게 볼일이 있다면서 잠시만 차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인가.

도대체 나는 왜 이 차를 탄 걸까...


마음속으로 수십 번 머리를 쥐어박으며 그 자연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1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 결국 차에서 내려 식당 쪽으로 내려갔다.


그 자연인은 식당 옆 수돗가에 서 있었다. 그 수돗가에서는 음식점 주인인 듯한 남자가 그날 조리할 음식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고, 자연인은 선 채로 그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리와 버섯, 해물 같은 것이 큰 함지박에 그득 담겨있는 걸 봐서는 해신탕 같은 보양식을 파는 곳 같았다.

나를 본 음식점 남자가 밑도 끝도 없이 웃었다. 뭔지 다 안다는 표정, 다 이해한다는 미소였다.


저분이랑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요! 그저 잠깐 차를 얻어 탔을 뿐이라구욧!


차라리 누구냐고 물어봤으면 해명이라도 할 텐데 그냥 가만히 웃기만 하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눈치 없는 자연인은 내가 겪는 곤혹스러움을 전혀 모르는지 자기 볼일을 마치고서야 그만 가자고 했다.


다시 차를 타고 달리면서 이번에는 방금 만난 음식점 주인의 인생사를 들어야 했다. 그 주인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재기했는지, 현재 얼마나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지 등등 나와 손톱만큼의 인연도 없는 사람의 일생을 요약본으로 들었다. 결론은 그 일대가 전부 음식점 주인 땅이라 상당한 부자라는 거였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아까까지 넣었던 약한 추임새마저 생략했지만, 자연인은 아랑곳없이 계속 말을 어어나갔다.


도대체 누가 이 자연인을 '여성 대하는 걸 무척 부담스러워하는 남성'이라고 했는가!


그 말을 한 사람이 거짓말쟁이거나 아니면 내가 여성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 뭐든 상관없이 나는 얼른 그 차에서 내리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드디어 내가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한적한 외곽 도로에 정류장만 덜렁 세워져 있어서 과연 여기에 버스가 제대로 서기나 할까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하지만 마의 승용차에서 드디어 해방됐다고 생각하니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전혀 감사하지 않았지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린 뒤, 차가운 산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다.


그런데 또 다른 악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0분 간격이라는 버스가 3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질 않는 거다. 황량한 도로에서 혼자 버스를 기다리며 다시 한번 머리 쥐어박기를 했다.


얼마 뒤 기다리던 버스가 내 앞에 섰다. 우리 지역으로 가는 버스 맞긴 했는데,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거였다.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로 꽉 찬 버스 안에서, 그 사람들이 맨 배낭에 옆구리를 찔리고 누군가의 등산화에 발을 밟히며 겨우겨우 버티고 서 있었다. 정말이지 수십 년 만에 타보는 만원 버스였다.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건, 버스의 운행 노선이 무척 방대하다는 점이었다. 온 시내를 다 돌아다니다 보니, 바로 가면 15분이면 될 거리인데도 40분 넘게 걸렸다.


고단한 내 하루 화룡정점의 순간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그 버스가 우리 집 근처를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거다. 나는 집에서 최대한 가까운 정류장에 부랴부랴 내렸는데, 도보로 20분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택시를 잡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기어기어 집에 도착해 시간을 확인하니 4시 45분. 1시간 50분 정도 걸리는 곳을 3시간 15분이나 걸려서 도착한 거였다. 젠장.


여기까지가 시월의 어느 날에 내가 겪은 황당한 해프닝이다.


다음 타로 수업 시간에 그 자연인을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기도 했는데, 그건 말 그대로 기우였다. 다음 수업에도 그다음 수업에도 자연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자연인의 행방을 묻지 않았고 강사분 또한 그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자연인은 잠시 인간세계로 내려왔다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간 신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런데 잠시 다니러 왔으면 조용히 다녀갈 것이지 왜 아무 죄도 없는 나를 곤궁에 빠트린 것일까? 도대체 왜 내게 시월의 어느 구린 날을 선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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