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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un 30. 2021

영화 <어둠속에서> 감상평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그 장면은 이력서를 쓰려는 순간 거울을 보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거울 속에는 그것을 응시하는 주체인 조쉬, 그가 보이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조쉬가 바라보는 시선’과 ‘그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 이렇게 두 개의 시선을 교차 편집한다. 이것은 이야기를 진행시켜나가는 시선과 주인공을 바라보는 세계(감독)의 시선으로 이해된다. 이때 주인공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에 대한 정의는 내리기 모호하다. 다만 이런 세계의 시선은 얇은 막과 같으며, 이것은 캐릭터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감싸고 있어서 그들을 지켜보는 것을 방해한다. 방해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시작을 영화의 끝에서부터 시작해야한다. 

   극의 엔딩에서 조쉬는 쇼트에서 사라졌다. ‘그는 왜 사라졌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 조쉬에 대해 생각해야한다. 그는 왜 동료인 디나를 살해하고 스스로 살인자가 됐는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단순히 댐을 폭파한 범죄를 덮기 위한 것이라면 하몬 또한 범죄의 대상이 됐어야 하지만 조쉬는 추가살인을 하지 않았다. 디나와 하몬의 차이점은 디나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역할을 많이 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러 인물들과 관계를 맺어도 조쉬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조쉬를 본다면, 디나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조쉬에게 말을 건넨다. 말을 건넨다는 것은 정보, 감정을 전달하는 행위다. 그러나 조쉬는 상대방과 감정 교류를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극 중반까지 조쉬와 디나, 하몬의 대화를 살펴보기만 해도, 조쉬는 두 사람의 대화를 저지, 단절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작품 중반 이후부터 그에게 타인의 감정의 에너지는 계속 들어가기만 한다. 그는 타인과 같이 반응해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기만 한다. 조쉬에게 감정 에너지라는 것은 일종의 오염을 의미한다. 이 오염이라는 것은 밝은 감정이 아닌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댐 폭파 후에 사람들은 조쉬에게 댐 폭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 디나에 대한 불안감 등을 이야기하며 조쉬가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과 행동과 흔들기 시작한다.  

    작품 또한, 조쉬와 관계를 맺는다. 극에서는 ‘조쉬가 바라보는 세계’와 ‘그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이 등장한다. 조쉬가 바라보는 시선과 그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서로를 마주본다.  그리고 둘다 관객에게 보인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관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개의 시선으로 비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맥락에서 관객에게 조쉬는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면서도 세계가 비춰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 때문에 허구와 같다할 수 있다.

    영화 속에는 환경 영화를 다룬다면 나올 수밖에 없는 모순을 드러내는 클리셰들이 등장한다. 인간이 댐에 물을 가둬 그 안의 생태계는 죽어간다. 그러나 다른 인간들은 물을 가둬 온천을 즐긴다. 심지어 온천을 이용한 사람들의 돈을 모아 디나는 환경 운동가들의 자금책이 되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인간이 소의 탈을 쓰고 우유 광고 판넬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그것들이다. 영화는 서사적인 흐름에 반대되는 감정을 실어주는 장면들을 카메라(감독, 세계)의 시선과 조쉬의 시선으로 관객에게 보여준다. 모순적인 감정의 양상을 품은 장면들은 세계가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그 자신의 모습이며, 이 장면들은 모든 캐릭터들이 조쉬에게 감정을 전달하듯 세계가 조쉬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작품의 세계가 만들어 지는 방식은 캐릭터들에게 각자 맡은 역할이 주어지며 시작된다. 그리고 주어진 성격과 반대되는 행위를 할 때 문제가 일어난다. 극의 중반까지 조쉬는 디나와 하몬의 대화를 저지하는 역할을 했었다. ‘댐 폭파’라는 사건 이후 조쉬는 하몬과 디나의 중간 연락책이 되며, 세계가 부여한 역할에 반대되는 임무를 수행한다.  또한, 타인들이 준 감정의 에너지를 디나에게 전달하려하며 에너지이동의 변경을 꾀한다. 그는 디나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그녀에게 수정을 선물하는데, 이것은 댐 폭파 후 밤에만 만나던 두 남여의 시간과 장면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다. 사건 후, 그는 디나를 세 번 만나는데, 그중 두 번은 자신이 있는 장소로 디나를 불러냈다. 그러나 수정을 선물한 그때만큼은 먼저 등장하거나, 그녀를 불러낼 수 있었음에도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만난다.  수정을 바라보는 디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감정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받아주지 않는다. 이것은 그녀의 캐릭터 소임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이기만 하던 조쉬는 주어진 역할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려는 시점에 이르러, 그녀에게 에너지를 터뜨리고 살인자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위치를 갖게 된다. 이것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으로 설명 된다. 조쉬의 좋지 않은 감정적인 에너지는 디나로 인해 발생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조쉬는 디나를 찾아가 전달하고 해소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 과정 속에 두 남녀의 이성적인 감정과 혼란스러운 에너지는 충돌을 한다. 결국 그 힘은 살인이라는 행동으로 형태를 변화해서 디나에게 보내진다. 불안을 바탕으로 한 이 에너지는 결국 전달되어 그녀는 세계가 준 역할은 수행했지만, 스토리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에 반해 감정을 받기만 하던 조쉬는 맡은 소임과 반대로,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살인을 통해서 사회적 위치는 변화했다.  

   작품 속에서 가장 큰 사건은 댐 폭파다. 하지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 최고 정점을 유지하는 지점은 조쉬의 살인 이후다. 그 이후 조쉬는 변화했다. 그는 환경운동가에서 살인자가 됐고, 연고 없이 이동만을 하는 존재가 됐다. 세계가 다른 캐릭터 들을 통해 전달하던 에너지는 캐릭터의 역할을 변경시키고 사라졌다. 실상 조쉬는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는 무의 상태가 됐다. 그것을 증명하는 장면이 바로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사각 거울 속 화면이다. 앞서 영화는 두개의 시선이 존재하며, 그중 하나의 시선이 관람을 방해한다고 했다. 그 시선은 세계를 표현하는 대상(조쉬)에게 집중되어, 세계 안 속에 일어나고 있는 모순을 관객에게 드러낸다. (그것을 우리는 관람의 방해로 인지했다.) 세계를 표현하는 역할을 맡은 조쉬는 사실상 허수아비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그가 이력서를 쓰려고 하는 순간 등장한 사각 거울 속에 보이는 쇼트다. 

    하나의 소품으로 여겨질 수 있는 사각 거울 속 조쉬가 보이지 않는 장면은 중의적 가능성을 갖는다. 첫 번째 가능성은 조쉬가 하몬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숨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극 속에서 카메라는 지속적으로 관객에게만 보여주는 단독적인 장면을 만들었다. 그로인해 카메라의 시선이 영화 속에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돌이켜보면 그 시선이 보여주는 것만을 관객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에는 비단 장소, 소품 등뿐만 아니라 시간도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 쇼트와 쇼트사이에 흐르는 시간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지속됐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 장면은 카메라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을 시간을 거슬러 보여줬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조쉬는 이력서를 썼고, 채용이 되어 이미 그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미래의 시간을 다뤘을 수 있다. 관객이 알고 있던 환경운동가, 살인자였던 조쉬는 사라졌다. 하몬의 말처럼 숨는 행위가 성공한 조쉬는 다른 장소, 미래(혹은 과거) 시간 속에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던 세계와는 다른 또 다른 세계에 조쉬가 존재하기에 사각 거울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단순히 주인공이 거울에 보이지 않는 장면이라는 것이다. 조쉬는 또 다른 곳으로 편입되지 않았고, 그냥 사각지대에 서 있지 않았을 수 도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추가하자면, 거울에 조쉬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그의 소망 때문이었을 수 있다. 거울 속 풍경은 평온한 세계처럼 느꼈고, 불안한 그에겐 일종의 노스텔지어로 보였기에 자신이 보이지 않은 장면을 조쉬가 상상하고 소망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가 갖고 있고, 관객에게 보여준 분위기는 긍정과 희망의 감정을 전달하지 않았기에 이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세 번째는 조쉬라는 형체가 시간의 연속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거울 속에서 사라졌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이유는 세계는 조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캐릭터에게 주어진 일을 마친 그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극 속에서는 맡은 역할을 수행한 캐릭터들은 카메라 앵글에 추가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런 카메라 앵글의 사용 방법으로 본다면, 조쉬는 세계 속안의 어둠으로 돌아갔으며,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됐을 가능성이 생겨난다. 여기서 세계는 무엇을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가라는 설명이 필요하다세계는 에너지를 조쉬에게 고이게 한다. 그리고 에너지를 다른 형태(살인)로 만들어 내보낼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결국 그를 아무 것도 아닌 상태로 만든다. 이 상황은 비단 조쉬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관객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관객도 아무것도 갖지 않는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조쉬의 시선으로 영화가 진행됐고, 관객은 그에게 감정을 이입했기와 그와 동일한 상태라 추측한다.) 이 영화는 오염물질이 자연 작용에 의하여 무해의 상태로까지 정화된다는 자연정화작용과 구조와 유사하다. 사회적 약속(댐 폭파)을 어기고, 그로인해 타인들에게서 받은 오염된 감정에너지를 무해의 상태(디나의 죽음, 조쉬의 사라짐)로 되돌리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무해의 상태, 무의 상태라는 것은 죽음 혹은 사라짐이란 형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린다. 이것은 인간(캐릭터)이 그러한 구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린다. 

   영화에는 또 다른 감독이 한명 더 등장한다. 이때 등장하는 감독은 “ 하나의 큰 구상이 마주하는 많은 문제들을 이끌 것이고, 자신의 구상은 그 일부이며, 큰 구상은 아니다.”라고 언급한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 큰 구상은 ‘댐폭파’가 됐다. 하지만,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생각하는 큰 구상이라는 것은 관객에게 허무함, 불안감, 모순된 감정을 선사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켈리 레이차트는 영화의 세계를 하나의 인물로 설정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인지되지 못했을 뿐이다. 이 세계는 서사의 흐름에 반대되는 행동을 보여주며, 캐릭터들에게 역할을 준다.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그 전체의 과정에서 생기는 허무함, 불안감, 모순된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것을 영화의 메세지라 할 수 없다. 다만, 영화 속에서 캐릭터와 캐릭터로써 흐르던 에너지 이동 과정이 관객과 영화로 확장됐다는 것을 알릴뿐이며, 나는  감독이 그것을 하게 이유는 영화의 세계와 관객의 거리에 대한 모종의 실험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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