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들어가며
1991년 데뷔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의 주요소재는 가족이다. 25편에 달하는 필모그래피 중에 가족을 다루는 영화는 9작품에 달하지만, 필자는 그중 6개의 작품을 선정하여,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로 구별 지었다. 그리고 첫 번째 시기에 해당하는 영화로는 <환상의 빛>,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로 선정지었으며, 두 번째 시기의 영화들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으로 정했다. 표면적으로 이 두 시기의 영화의 큰 특징은 혈연·직계가족의 변주로 볼 수 있으며, 감독이 ‘가족서사’를 갖고 실험을 하고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뚜렷한 변화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감독은 실험을 하고 있는지 뒤늦었으나, 목적과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한다. 이것을 알게 된다면 더 깊게 그의 영화를 감상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찾으려고 하는 것에 대한 답변은 필자의 글에서 찾을 수 없다. 필자는 감독이 만든 세계의 곁에 붙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일 뿐, 그 세계와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술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며, 각 시기의 마지막에 제작된 영화를 중심으로 서술하려한다.
02-1. 첫 번째 시기: 봉합되지 않는 상처를 가진 직계·혈연 가족
첫 번째 시기에 감독은 <환상의 빛>,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라는 영화를 만든다. 이 세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소속된 개인이 부재(不在)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렸다는 것이다. 이 부재에 대한 원인은 죽음과 버림받는다는 것 등의 이유로 나타나는데, 남겨진 인물(들)에게 이 부재는 봉합될 수 없는 상처와 같다.
영화 <환상의 빛>에서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할머니와 첫 남편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으나, 그 현상에 대한 이유와 그로 인해 발생한 감정을 해소할 길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재혼한 남편 타미오(나이토 타카시)와 그의 아버지(에모토 아키라)가 나타난다. 그 후 그녀는 새롭게 만난 토메노(사쿠라 무츠코)가 사라지는 사건을 겪고,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른다. 이렇게 영화는 종료된다. 필자는 <환상의 빛>에서 유미코에게 주어진 부재에 대한 부채감은 스스로 해소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부재에 대한 부채감을 해소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인물에게 주어진 부재를 대체재, 즉 다른 가족(타미오)을 투입시킨 후에 부재를 받아들이는 시간과 토메노와의 사건 등을 통해 부재의 아픔을 상쇄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옮은 표현이겠다.
영화 <환상의 빛>은 유미코에게 온전히 모든 감정을 경험할 수 있게 설정했다는 지점이 하나의 장점이다. 그로인해 유미코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충분히 겪을 여유를 누리며 성장했으며, 그 안에서 관객은 인물의 부채감을 해소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유미코와 이쿠오의 아들인 유이치에게 상실과 충족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생긴다. 동일한 직계와 혈연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개인이 가족의 공동체 속에서 화합하는 과정만을 그렸다는 인상을 준다.
두 번째 작품인 <아무도 모른다>에서는 상처를 개인에게 주지 않고 불완전하지만 혈연관계인 가족에게 던진다. 이 가족은 앞서 말한 영화 <환상의 빛>의 유이치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처에 대한 상실과 충족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결핍과 상처를 경험해 본적이 없으며, 이로 인해 이들은 부재를 채울수도 상실을 느낄수도 없도록 설정했다. 마치 이쿠오가 사라졌을 때의 유미코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미코에게 어린 아들이 있었고, 재혼이라는 사회적 제도가 있었다. 이이 비해 <아무도 모른다>의 사남매, 아키라(야기라 유아)와 쿄코(키타우라 아유), 시게루(키무라 히에이), 유키(시미즈 모모코)에게는 자신들 밖에 없으며,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도 모른 채, 자신들의 삶에 주어진 결핍을 하나의 생존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린 네 남매와 다르게 관객은 결핍과 상처를 알고있다. 이 감정을 겪은 경험의 차이로 인해 관객은 주인공들이 겪는 일에 대한 감정을 더 몰입하게 되고 슬픔을 경험한다.
02-2. 첫 번째 시기: 봉합되지 않는 상처를 가진 직계·혈연 가족
감독은 개인과 불완전한 가족이 받아들이는 상처에서 벗어나며, 혈연·직계가족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 시선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바로 <걸어도 걸어도>다. 이 작품에서도 감독은 부재에 대한 문제를 가족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모습에 집중하며, 주인공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 방법은 앞선 두 작품에서 했던 것 동일하다. 첫 번째는 <아무도 모른다>에서 처럼 그것을 인지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남겨진 가족들이 부재한 인물을 시간이 갈수록 무감각한 존재로 여기도록 변주했다. 그러나 이 무감각해진다는 것은 부정적 의미는 아니다. 영화에 한정해 말하자면 무감각의 또 다른 의미는 상처의 방목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준페이 엄마(키키 키린)에게는 아들의 부재는 사라질 수 없는 아픔이지만, 그 상처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정신적 영역의 시간은 멈춰도 육체의 시간과 남겨진 가족과의 시간은 흐르기 때문이다. 그녀의 상처는 방목되어 자신 안에서 떠돈다. 그리고 가끔 의미 없는 존재가 그녀에게는 상처로 다가오기도 한다. “준페이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아들의 기일에 집에 들어온 나비를 쫓는 것처럼 말이다. 평소 엄마에게 나비는 의미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의 기일에 보게 된 나비는 죽은 아들이 된다. 방목된 상처는 준페이 엄마에게 가끔 찾아오지만, 그것을 결코 잊지 못하게 한다. 더불어 부재에 대한 무감각함은 기일(忌日)이라는 시간적 영역으로 변하여 매년 되돌아온다. 그렇게 상처는 아물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방목된 채로 인물들과 함께 살아갈 뿐이다.
두번째는 <환상의 빛>처럼 대체제를 설정해주는 것이다. 극 중 인물들은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려 하는데, 감독의 초기작품인 영화 <환상의 빛>,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그 해결책을 ‘혈연·직계’를 통해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엄마(키키 키린)의 정신적 시간은 멈췄기에 이런 봉합을 할 수 없다. 이에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엄마외의 인물인 할아버지 쿄헤이(하라다 요시오)에게 의붓 손자 아츠시(타나카 쇼헤이)를 해결책으로 설정해 준다. 극중 아츠시에게 말을 걸어주는 인물은 엄마 유카리(나츠카와 유이)와 아빠 료타(아베 히로시)를 제외하며 할아버지가 처음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진료실에서 약물의 이름을 읽는 아츠시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그의 꿈이 ‘피아노 조율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후, 할아버지는 아츠시의 손금을 보며 재주가 많아 보인다며 “의사가 되려했지”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며, 의사가 되기로 한 계기와 좋은 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상한 대화는 아들이자 아버지인 료타가 진료실에 들어가며 종료된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따라서 의사가 됐어야할 장남 준페이는 죽음을 맞이하고, 차남 료타는 그림을 복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새롭게 등장한 의붓 손자가 의사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츠시는 생부를 따라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 싶어한다. 의붓손자를 통해 해소하고자 했던 할아버지의 소망은 미완인 채로 남게 된다. 또한, 아츠시는 할아버지와 대면을 할 때 얼음 알갱이가 목에 걸리자 뱉으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삼켜버리며, 음악선생님이 좋아서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 싶다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관객은 그가 생부와 같은 직업을 갖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을 모르는 할아버지는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어 가야 하는 장남의 대체제로서 아츠시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성사되지 못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료타의 가족들과 아츠시는 정서적 공감대는 형성하지 못했고,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니 쌓인 신뢰는 당연히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감독이 제시한 해결책은 실패한 셈이 된다. 그럼에도 감독은 삼부자에게 무엇인가를 원상 복귀시킨다는 공통점을 설정했다. 인물 자신들은 모르는 공통분모가 생기는 것이다.
감독은 장녀 지마니(유)와 차남 료타에게는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 주고, 엄마 토시코에게는 상처의 방목과 무감각해짐으로, 아빠 코헤이는 대체할 사람을 찾는 것을 보여주며 영화 속 봉합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상처를 상쇄시킨다. 그리고 이내 극에서 엄마 토시코와 아빠 코헤이, 두 내외가 사라지며 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마무리 된다. 분명한 것은 가족에게 주어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감독의 시선은 혈연(직계)가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다.
03. 두번째 시기: 비(非)직계가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는 누적된 시간과 의지
앞선 세 작품을 통해 감독은 혈연·직계가족이라 할지라도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 후 감독은 부재와 상처를 갖는 가족이라는 서사에서 빗겨간다. 상처를 받아들이는 가족이라는 테마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에 대해 집중하는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두번째 시기에 선정된 영화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어느 가족>이다.
이 세 영화의 공통된 특징은 불완전한 가족이며, 그 불완전함을 해소하는 것을 인물들에게서 찾고있다는 것이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혈연관계가 아닌 가족은 성립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만든 작품이 영화<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이며, 직계가족이 아님에도 가족은 성립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만든 작품이 바로 <바닷 마을 다이어리>라 할 수있다.
이 두 편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 갖는 의지와 누적된 시간이다. 이것은 감독이 만드는 두 번째 시기의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가족관계를 이루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 연대는 혈연·직계가 아닌 이들을 가족으로 묶어주는 단초가 된다.
시간의 축척을 통해 연대의 가능성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는 기른 아들인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가 아버지(후쿠야마 마사하루)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발견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숨겨둔 사진을 발견하며 아버지는 함께 시간을 보낸 남자 아이는 비록 혈연관계는 아니나,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은 관객에게 료타와 혈연관계인 친아들 류세이(황 쇼겐)를 만나러 가는 고속도로의 길을 인서트 쇼트로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이 쇼트는 배경설명보다는 자신과 혈연관계인 아들 류세이를 만나러 가는 료타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라 의미가 더 크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도 이런 현상을 겪는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지점은 등장인물 전체가 가족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현시킨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피가 섞이긴 했으나, 직계 가족은 아닌 아사노 스즈(히로세 스즈)와 세 자매의 공통점은 그녀들의 ‘아버지’ 라는 존재뿐이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그 후 스즈는 자매와 함께 지내며 매실을 따서 술을 담그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공유하며 연대를 이루며 가족이 된다.
이 작품들을 통해 감독은 혈연과 직계 가족을 바탕으로 하는 좁은 가족 단위에게서 벗어나 구성되는 넓은 의미의 가족(공동체)라는 지점으로 시선을 향하게 된다. 그렇게 두 번째 시기의 마지막 작품인 <어느 가족>이 제작된다.
04. 두 번째 끝자락에서 시작된 세계의 변주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특이하다. 아버지와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 마트에서 물건을 훔친 후에 사라지는 순간에 카메라는 그 인물들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 카메라의 시선은 직원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집어 들었던 물건과 물건이 사라진 후의 마트의 풍경을 응시한다. 그 후에야 화면 위로 <만비키가족(挽引き家族)>이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감독은 물건을 훔친 두 명을 따라 가지 않고, 그들의 손이 닿은 물건을 바라보는 이유는 사라진 물건보다는 무엇을 훔치는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이며, 도둑질이 성공한 세계에서만 그들의 가족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극 속에서 유사 가족들이 훔친 것은 초콜릿, 라면, 문방구의 간식, 유리(사사키 미유)가 좋아하는 밀개떡, 아키(마츠오카 마유)가 좋아하는 샴푸, 오사무(릴리 프랭키)가 원하는 낚싯대, 세탁물 속에서 나온 금은품 등이다. 이런 열거를 한 이유는 단순하다. 이것들의 공통점은 생계와는 관계없고, 오직 그들의 기호가 담겼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감독은 끊임없이 주인공들은 타인의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훔친다’는 것은 중의적이다. 첫째, 형태가 있는 물건을 훔치고, 둘째로는 공동체 구성원의 마음을 서로 훔친다는 것이다. 다만, 좀도둑들이 마음을 훔치는 것은 행위의 주체와 객체가 바라던 결과는 아니겠으나 이 지점으로 인해 대중들은 영화<어느 가족>의 인물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인정하게 된다.
<어느 가족>은 완벽한 ‘탈(脫)가족서사’인 동시에 ‘가족서사’라 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사전적 어휘가 갖는 뜻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가족이라 불릴만한 공동체를 구성하며, 대중은 이 작품의 구성원을 가족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감독의 작품세계를 구분 지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첫 시기의 세 작품은 상처와 부재를 받아들이는 인물과 가족의 이야기였다면, 두 번째 시기의 세 작품은 상처와 부재를 통해, 가족을 스스로 일궈간다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어느 가족>으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물건을 훔치고, 누군가 버렸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주워”와서 살아간다. 이런 그들을 통해 감독은 시간의 축척과 개인의 의지를 통해 탄생한 공동체 또한 혈연관계로 묶인 가족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고 믿으며 그 세계를 관객에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들 중 부모관계로 묘사되는 오사무의 직업은 아파트를 짓는 건설현장의 인력이며, 노부요(안도 사쿠라)의 직업이 세탁공장의 직원으로 설정됐으며, 유리에게 원래의 집으로 돌아갈지 묻는 쇼타(죠 카이리)의 뒤를 아무 말 없이 따라 걷는 유리를 보여주며 인물의 선택에 대해 보여주기도 한다. 심지어 노부요와 하츠에(키키 키린)는 자신들이 선택한 인물들이 갖는 깊은 유대감에 대해 서스름 없이 이야기한다. 두 사람의 이런 대화는 자신들이 선택한 행동에 대한 합리화일수 있으나, 관객에게 “이런 우리들도 가족이다”선언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렇듯 작가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직업, 행동과 대화 등을 보여주며 이 공동체가 혈연·직계가족보다 강한 구속력을 갖는다고 표현한다.
<어느 가족>은 새로운 가족의 구성에 대한 방식을 보여준 것은 확실하지만, 극 안에서 유리라는 인물이 방치됐다. 이 지점이 필자가 감독의 두번째 세계의 마지막 작품으로 <어느 가족>을 꼽는 이유다. 감독의 앞 선 작품들은 인물들의 내일을 그릴 수 있는 희망이 암시되며 극의 세계는 닫혔으며, <어느 가족>의 대다수 인물들의 마지막 등장 또한 희망을 암시한다. 유리를 제외하고 말이다. 우선, 오사무와 쇼타는 유사 부자관계를 재정립했다. 쇼타와 오사무와 함께 접견을 한 노부요는 쇼타의 부모를 찾을 단서를 공유하며, 자신들의 역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관계의 정리를 한다. 아키는 하츠에의 집에 다시 찾아가며, 하츠에의 마지막은 바다로 놀러간 가족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장면이기에 유리를 제외한 인물들의 끝은 희망으로 마무리 된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카메라는 엔딩에 도달해도 유리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측면에서 그녀를 바라본다. 이것은 그녀의 미래를 방치한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가 유리를 응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앞서 언급한 오프닝 장면에 대한 해석을 다시 갖고 와야만 한다. 감독이 물건을 훔친 인물을 따라가지 않고 그들의 손이 닿은 물건을 바라보는 이유는 도둑질이 성공한 세계에서만 그들의 가족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 했다. 또한 모순적이게도, 이 세계는 등장인물이 물건을 훔친 죗값을 치르게 한다. 그들이 치루는 죄의 값으로 쇼타는 다리를 다쳤고, 다른 이들은 마음이 다쳤다. 하츠에는 아키의 가족에게 돈을 갈취했으므로 도둑질에 성공했으나, 그녀는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죗값을 치루지 못한다. 그러나 유리는 도둑질을 실패했기에 죗값을 치루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모순적이게도 훔치는 행위를 실패했기 때문에 공동체 가족들이 만든 세계에 살 수 없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규칙을 깨고 쇼타와 유리에게 간식을 나눠준 문방구 할아버지(에모토 아키라)의 죽음은 유리가 좀도둑 가족과 살수 없는 증거이며, 쇼타 또한 가족의 유사관계를 깨기 위해 도둑질을 하다 일부러 다친 것 또한 이를 증명한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의 세계는 유리에게 곁은 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감독의 기존 영화들이 했던 방식처럼 가족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했고, 모두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유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유사 가족관계인 공동체 구성원의 선택들로 인해 그들과 헤어졌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구와도 만날 수 없다. 실제 범죄를 저지른 인물들에 비해 어린 유리에게 닥친 상황이 가혹한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감독은 유리를 이런 상태로 만든 원인에 대해 선뜻 답하지 못한다. 그녀를 훔치고 함께 시간을 누적시키며 유사 가족된 사람들의 잘못 때문인지, 그녀를 끝까지 돌봐주지 않는 사회의 잘못인지에 대한 것을 프레임 안에서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이 성립하는 이유, 세계가 성립되는 이유와 그들이 속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라는 두 가지 가치관의 모순 속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어린 그녀를 방치한다.
엔딩장면에 카메라는 학대받는 집의 베란다에서 혼자 노는 그녀를 고정된 채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 직후에는 카메라는 베란다 밖으로 빠져나온다. 카메라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홀로 빠져 나가는 것이다. 감독은 고정된 쇼트를 대응하는 쇼트로 인물의 측면을 바라보는 쇼트를 사용했는데, 이때 감독은 30도 규칙도 어긴 채 연속성이 없는 이동을 한다. 이런 비약전환(jump cut)을 하면서까지 그녀를 베란다 안에 둔 채 카메라만 빠져나온 이유는 희망을 암시하는 것도 아니고, 긍정적이라 할 수 없다. 베란다 너머에 있을 지도 모르는 것과 언젠가 유사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한다는 것을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감독은 유리가 유사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면 그러니까 비(非)혈연관계를 성사시킬 수 있는 것은 법적으로 성인이 된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거나, 가족이 없는 쇼타와 같은 상황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극을 만들었다. 쇼타는 좀도둑 가족의 관계를 깼다. 그런 감독은 유리가 아닌 쇼타를 유사 가족을 재정립할 수 있는 인물로 설정했다. 그렇기에 엔딩 쇼트 장면에서 유리에게 희망과 긍정을 찾을 수 없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의 유리를 통해 가족이라 불릴만한 공동체라는 것은 혈연관계와 자신의 의지만으로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한계를 가진 실패한 가족서사라 할 수 있다.
05. 세 번째 시기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감독은 가족에 대해 실험을 했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혈연과 비(非)혈연이라는 둘레에서 벗어나 또 다른 형태의 가족(공동체)을 이루는데 성공했다. 이것은 가족이 되는 방법에 대한 논의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두 번의 변화를 겪은 감독은 세 번째시기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어느 가족>의 유리를 쳐다보지 못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세 번째 시기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이루는 사회가 가져야할 도덕, 윤리의 기준의 성립이 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의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에서 “자신의 발밑의 사회와 연결된 어두운 부분을 주시하면서 한편으로 좋은 점을 영화 속에서 표현하는 것에 도전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필자는 감독이 가족과 그 구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해체하고, 이어 붙이는 과정을 반복했던 이유를 추론할 수 있었다. 그건 가족이 최소한의 사회적 연대를 이룰 수 있는 단위이며, 감독 자신이 속한 끊어낼 수 없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은 변하고 있으며, 그 변화는 그가 진행하는 가족 서사 실험이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는 실패를 통해 실험의 한계지점을 알게 된다. 이 실험의 조건 중에서는 우리가 봤던 것처럼, 가족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형태가 붕괴된 것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가족 서사 실험에 대한 결과는 언제나 완벽한 실패는 아니었다. 오히려 실패를 통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상처를 받아들이는 개인과 가족이라는 구성요소를 실험했으니, 이제 그 공동체가 살아갈 뼈대인 모럴(Morale)을 다지는 일이 남았다. 그리고 감독은 앞으로 만들어질 세 번째 시기에서도 실패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가능성을 열어 갈 것이다. 필자는 이 실험이야말로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감독이 인간을 바라보는 애정의 증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