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의 간극에 대해 –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
1. 영화 ‘아마데우스’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난 직후의 감정은 “재능이라는 것은 과연 공평하게 분배되었는가?”란 물음이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살리에르 증후군’ 이 이렇게 탄생한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자신과 비슷하거나 같은 직종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을 앞설 힘이 없으며 조력자로 활약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표현한 이 증후군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지휘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살리에르의 주체적인 행동 등이 초래하는 결과, 파장 등을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고 있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우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
아주 기나긴 명사인 저것이 우리가 ‘모차르트’라고 흔히 알고 있는 사람의 정확한 이름이다. 그리고 이름의 소유자인 그는 서명을 할 때 중간 이름은 테오필루스로 서명을 했고, 이는 라틴어표기로 발음할 때 ‘아마데우스(Amadeus)’라 읽힌다. 그리고 이것의 의미는 ‘신이 사랑하는’이란 뜻이다. 영화 속에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그의 앞날을 망쳤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정작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살리에르를 “유일하게 나의 작품을 관람해준 옛동료” 라 이야기하며,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단 한사람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때, 볼프강이 느끼는 자신의 삶과 살리에르가 생각했던 그의 삶과 간극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볼프강은 사랑하는 사람과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여 아들을 낳았고, 현실적 상황은 힘들었으나 언제나 그의 음악적 재능으로 일을 했고 풍족하지 않았으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에 관련하여 나는 모차르트, 살리에르가 추구하는 가치가 서로 달랐기에 일어난 것이라 생각을 했으며, 그것이 좁혀지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과 그때 나타난 음악에 대해 살펴보고자한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통해서 말이다.
2. 영화는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교차하는 플래시백 형태로 진행된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과는 달리 극중 화자는 안토니오 살리에르이다. 그리고 극의 흐름은 그가 바라본 모차르트와 그가 모차르트에게 했다고 주장하는 일들에 대한 고백이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삶보다는 살리에르의 삶을 모차르트의 생애에 맞물려 풀어냈다고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 영화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곡은 모차르트의 <교향곡 25번 g단조>이다. 모차르트는 두 개의 단조 곡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한곡이 오프닝에 삽입됐다. 한국에서도 자주 샘플링에 이용되어 친숙한 이 곡은 바이올린 소리를 이용하여 묵직하고 어두운 소리를 내지만, 음들의 속도가 빠른 탓에 긴박감이 고조된다. 이는 기독교 문화를 믿는 나라의 궁정악장이 신에 배반한 자살을 한 것과 화자의 죽음의 위기에 닥쳐왔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곡이다. 두 번째로 극에 등장하는 모차르트의 곡을 보기 전에,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 대한 악감정을 갖기 전에 모차르트를 위한 <환영 행진곡>을 썼던 장면이 영화에 나온다. 이때 독백으로 살리에르는 현재로 돌아와 주교에게 자신과 반대되는 모차르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버지의 원조로 음악을 시작한 볼프강과 아버지의 죽음으로서 음악을 시작한 자신의 위치에 대해 토로하게 된다. 모차르트와의 첫 만남에서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보기 위해 몰래 숨어 들어간 방에서 달작 지근한 초콜릿을 훔쳐 먹게 된다. 신을 사랑하고 찬미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표라 했던 살리에르의 이와 같은 행위는 모순적인 행위이다. 이것은 ‘선악과’처럼 그 때의 모차르트와의 만남이 잘못된 것이었으나 필연적이었음을 표현한 장면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 직후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연주를 듣고 악보를 다시 보게 되는데, 그 순간, 감미로운 소리가 환희로 바뀌는 경험을 했고, 신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았다는 고백을 주교에게 하게 된다. 덧붙여 “왜 신은 저 녀석을 도구로 삼았는지 의구심이 들었으며, 이건 신의 실수다.” 라고 살리에르는 말한다. 이 때 모차르트는 연인 콘스탄체와 거꾸로 말하는 장난을 하는데, 여기서 그의 창의적이면서 천진난만한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제 다시 영화에 등장한 두 번째 작품과 얽힌 이야기를 바라보자. 두 번째로 등장하는 곡은 그의 창의적이고 천진난만한 그의 모습을 다시금 볼 수 있다. 그는 요세프 2세 황제에게 하렘을 배경으로 언어 등의 배경이 중요치 않은 “사랑”에 대한 작품을 만드는 것에 대한 허락을 구한다. 이때 등장하는 곡은 <후궁에서의 도주>라는 오페라이다. 기존의 아리아등의 형식대신 대사와 익살로 표현된 특이한 사운드의 관현악과 성악의 기교 등의 특징이 있는 작품이다. 이 오페라의 여자 주인공 이름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와 똑같다. 10분간의 아르페지오가 연속으로 등장한다는 이 오페라의 실제 성악 가수는 살리에르가 사랑했다고 고백한 여인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수 혹은 여자)사랑한 사람이 자신의 경쟁자라 생각되는 무대에서 화려하고 걸작이라 불리는 오페라의 가수가 된 것을 보는 살리에르는 신에게 또다시 묻는다.”왜 하필 그인지, 왜 그를 (모차르트)통해 겸손을 배우게 했는지“에 대해 말이다. 이렇게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에 대한 미움을 표현하나 맞수의 능력에 대한 미움보다는 이것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에 그치게 된다. 이후, 모차르트는 자신이 머물던 하숙집 딸인 콘스탄체와 결혼을 하게 되며 빈에 정착한다. 그 후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왕궁에서 일할 기회를 빼앗게 된다. 이것을 알 리 없는 콘스탄체는 살리에르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살리에르는 그의 아내에게 밤에 다시 찾아오라는 치욕스런 언사를 하게 된다. 그날 밤까지 살리에르는 기도한다. 콘스탄체가 찾아오지 말기를. 하지만, 그녀는 그를 찾아왔으나, 살리에르는 그녀를 되돌려 보낸다. 살리에르는 이때부터 신을 믿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살리에르는 신이 모차르트를 통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라, 신만을 찬양하며 살아간 자신에게 신이 견딜 수 없는 고난(타인에게 모욕을 준 것)을 줬다는 생각과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는 모차르트에 대한 시기와 미움이 뒤섞여 이신에 대한 부정을 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살리에르는 이에 더 모차르트의 생계를 막게 된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개를 키우는 귀족에게 다녀오는 길에 그는 시장의 풍경을 구경한다. 등장하는 풍경은 낮에 활기차고 따뜻한 날씨의 시장이다. 이후, 콘스탄체는 임신을 하게 되고, 볼프강의 아버지와 함께 빈에서 살게 된다. 세 명이 가면무도회에 간 날, 아버지는 검정색 모자와 옷을 입고, 모차르트 부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게임의 벌칙으로 모차르트에게 연주를 시키자, 피아노를 거꾸로 치기도하고, 유명작곡가를 흉내 내기도한다. 이 장면에서 특이한 지점이 두 장면이 나온다. 첫째는 자신의 흉내를 내보라고 말하는 가면을 쓴 살리에르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싫어한다. 이것은 그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라 우리는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물음을 통해 알게 된 점은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에 대한 열등감이 부정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재능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재능이 있는 그가 자신을 평가하는 지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싫어했다는 것보다는 그러한 재능이 없는 자신에 대해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이 갖지 못한 재능을 가진 살리에르, 자신에 대한 미움에서 미움과 시기 등이 발현된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사랑했고, 더 나아가 독점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영화“아마데우스”에서 등장하는 세 번째 곡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이 당시에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작품을 쓰게 된다. 이 작품은 희곡에 음악을 덧붙이는 것을 금지한 황제마저도 그 규칙을 깬 작품이다. 모차르트는 역시나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서창 없이 20분이나 곡이 계속되고, 중창의 인원이 계속 늘려나가는 것을 황제에게 자랑스럽게 여기며 공연을 진행하게 된다. 하지만, 황제는 공연에서 하품을 하게 되고, 공연은 9회 만에 끝나버렸다.
다만, 살리에르는 이렇게 고백했다. “3막이 대단했고, 4막은 말할 것이 없었다.”라고 말이다. 또한,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는 영화 속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통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서로를 시점 샷으로 잡아 화면을 처리하지만, 동일하게 일어선 모습을 미디움 샷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동등한 위치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 전까지는 모차르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타인에게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살리에르도 포함)은 의자에 앉아있고 모차르트는 서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것과 다른 카메라사용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살리에르는 “극에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넣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하고, 모차르트는 이 조언에 대해 자신보다 한수 위라고 말하며 응대한다. 더불어, 살리에르틑 모차르트를 자신의 작품 공연에 초청하고 서로가 서로에 대해 영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부분을 통해 모차르트 또한, 살리에르를 동료로 생각하고 나름의 경쟁상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살리에르의 공연을 보여주는 시퀀스에서 황제가 자신의 음악을 칭찬하는 와중에도 모차르트의 자리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살리에르를 비춰 그의 열등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모차르트는 선의의 경쟁상대로 살리에르를 보지 않고, 그의 작품에 대해 칭찬하고 신나게 즐긴다. 집에 돌아간 모차르트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때부터 그의 작품에서 끔찍한 형상 등이 나타난다. 이에 대한 변화는 모차르트가 쓰는 가발로도 확인을 할 수 있다. 영화의 초반 모차르트는 흰색의 화려한 가발을 쓴다. 그 후 분홍색 가발을 쓰고 나오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발을 쓰지 않게 되는데, 그의 머리를 어두운 갈색이었다. 이는 극의 흐름이 점점 어두워짐을 암시하는 동시에 모차르트의 경제적인 위기도 알려주는 이중적인 부분이라 여길 수 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모차르트가 만든 작품은 <돈조바니>다. 돈조바니는 2막으로 구성된 오페라인데, 호색한 돈 후안이 한 여성에게 추근거리다가 그녀의 아버지의 질책을 받고 결투 끝에 아버지를 죽이게 되는 이야기이며, 이후 반성하지 못하는 그는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오페라이다. 그간 모차르트가 작곡한 오페라에서는 아버지의 존재가 부각되는 곳이 없고, 단조를 두 개밖에 짓지 않을 정도로 밝은 곡을 만든 그였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모차르트에게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오페라이기도 하다. 살리에르의 술수로 5회 만에 막을 내렸지만, 정작 그는 매회 그 공연을 보러갔다. 이것에서는 살리에르의 질투가 집착으로 변질된 것을 암시한다. 더불어, 영화 속 오페라에서는 주인공들은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세트의 무너짐 등이 나타난다. 이 부분 또한 모차르트의 심경을 대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에 혼란을 느낌을 안 살리에르는 모차르트 아버지가 가면무도회에서 입었던 옷과 가면을 쓰고 볼프강의 앞에 나선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위한 진혼곡을 써달라는 의뢰를 하게 된다. 살리에르는 이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이 진혼곡은 모차르트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난 후 연주될 진혼곡은 그 자신이 써야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 곡을 신에게 들려주겠다는 맹세를 했음을 주교에게 고백한다. 그리고 신에 대한 찬양할 때 사용되던 도구인 손을 바라보며, 이제는 사람을 죽이고 신을 조롱할 생각한 한다고 덧붙이게 된다. 그렇게 모차르트는 진혼곡을 쓰는 동시에 친구의 부탁으로 환상성이 가득한 오페라를 만든다. 그때 제작된 것이 <마술피리>다. 이 곡은 가곡과 민요 등이 뒤섞이고 화려한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이 모두 섞여있다. 이곡은 친구의 부탁으로 오페라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청중도 편안하고 다채롭게 음악을 즐길 의도로 만든 곡이라 한다. 더불어, 모차르트의 오페라 중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작품이기도하다. 두 개의 곡을 동시에 쓰는 모차르트는 점점 쇠약해지고, 양쪽에서 모두 자신이 요청한 작품에 대해서 재촉을 시작한다. 이때 당시 모차르트는 친구의 악단 사람들과 신나게 하룻밤 놀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이 나온다. 배경이 겨울이 된 탓도 있지만, 모차르트는 집에 돌아오는 길을 영화속에서는 두 번 그린다. 첫 번째는 활기차고 밝은 분위기, 따뜻한 날씨의 풍경을 그렸는데, 이번에는 추운겨울의 아침에 눈길에 미끄러지는 모차르트를 부축해주는 사람 없는 황량한 시장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아내와 아들이 온천으로 말도 없이 여행을 떠난 것을 알고 깊은 상심에 잠긴다. 영화적 반복이면서도, 볼프강의 현실을 대변하는 또 다른 장면이기도하다. 이렇게 완성한 <마술피리>의 음악지휘를 하며 쓰러진 모차르트를 찾아온 살리에르는 그를 도와 모차르트의 두 개뿐인 단조 중 하나인 <진혼곡 d 단조 K.626>을 만들기 시작한다. 앞에 오프닝에 등장한 살리에르가 죽음의 위기에 등장한 <교향곡 25번 g단조>과 모차르트의 죽음에 이르렀지만, 미완성으로 마무리된 <진혼곡 d 단조 K.626>을 통해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 감독이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두 개의 평행이었으나, 결코 만날 수 없는 그런 두 사람의 간극 말이다. 마지막 레퀴엠을 마무리 하지 못한 채, 모차르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공동묘지에 다수의 사람들과 매장됐다. 신에게 그 진혼곡을 들려주겠다던 살리에르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셈이었다.
3. 이렇게 두 사람의 생애에 대해 음악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앞서 살리에르증후군에 언급했었다. 그것은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 앞에 앞설 힘이 없으며 조력자로 활약할 수밖에 없는 것을 뜻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살리에르는 잘 못 이해한 듯싶다. 자신이 가진 재능은 곡을 만들고 작사를 하는 재능은 물론 누군가를 알아보고 발견해내는 재능이 더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모차르트의 재능을 먼저 알아보고 모차르트의 앞길을 방해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의 재능은 작곡이라는 분모를 바탕으로 한사람은 더 깊게 그리고 또한 사람은 그것을 알아보는 재능으로 그것의 가지를 달리 뻗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신은 재능을 공평하게 분배하지는 않았으나 재능을 골고루 분배했으나 그 농도를 달리했고, 그 사용의 여부는 개인에게 맡겼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했기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고 여겨진다. 살리에르가 주교와 헤어지고 나서 정신병원의 환자들에게 “너의 죄를 사하노라” 라고 말하는 것은 살리에르가 행한 신의 조롱임과 동시에 자신이 찬양을 했던 신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것이라 생각된다.
노력하는 천재 살리에르와 타고난 천재 모차르트의 간극은 좁혀질 수 없으나,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라는 단순한 지점이 아닌,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그 순간의 차이 떄문일것이라 생각된다. 더불어, 이 영화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두 사람의 극단적인 성격과 점차 우울해지는 극의 분위기를 딛고 들리는 볼프강의 음악으로 인해 더 빛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