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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ul 05. 2021

영화 <아사코> 감상평


01.

영화 <아사코>의 원제는 <아사코 I & II>다. 제목은 왜 <바쿠 I & II> 나 <료헤이 I & II>가 아닌 것일까? 영화에는 똑같은 얼굴을 한두 명의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런데 제목은 왜 <아사코 I & II>란 말인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바쿠와 만날 때의 아사코의 모습과 료헤이를 만날 때의 그녀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영화의 외연에는 한명의 여자와 두 명의 남자가 드러나지만, 마치 아사코는 다른 사람인양 행동한다. 관객은 이 영화를 네 남녀의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해도 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아사코는 바쿠가 이름을 물어보면서 사랑을 시작했고, 타인의 이름이긴 하나 료헤이 또한 이름을 불리며 아사코와 만나 사랑을 시작한다. 영화 <아사코>를 상기해보자. 그 시작은 아사코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시작된다. 쌍둥이 자매의 사진이 있는 전시회를 관람하고 갈림길의 선택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는 순간 폭죽이 터지며 그녀는 바쿠를 만난다. 그 후, 그녀는 사랑을 시작하며 바쿠가 떠나자 오사카에서 도쿄로 도망을 간다. 그렇게 극의 자막으로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것을 알려준 후, 등장하는 첫 인물은 료헤이다. 그는 자신을 바쿠라 부르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녀가 신경 쓰인다. 결국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지만, 2년 전 바쿠가 아사코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갑작스레 이별을 통보 받는다. 그리고 폭죽이 터졌을 때, 바쿠가 아사코에게 다가왔듯이, 이번에는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다가간다. 필자는 료헤이에게 아사코는 바쿠와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극의 제목은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자 아사코를 지칭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화 <아사코>라는 제목은 두 남자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를 지칭하는 것일 테다.


02.

바쿠와 료헤이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사코의 모습과 두 남자에게 각기 대응하는 그녀의 모습 속에서 나타나는 상황들은 짧게 드러나지만, 초반 이야기 진행 속도 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변화하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이 부분은 세밀하게 나눠져 보여져야한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빠르게 지나가며,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돌아간다. 이때 특이하게 여겨지던 장면은 두 남자가 동시에 등장할 때 카메라의 시선에 있다. 이 장면은 아사코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이 일치한다. 그리고 영화의 중간 아사코의 시선이 카메라의 시선과 일치한다. 이 시선이 흥미로운 이유는 아사코가 바라보는 시선만을 등장시키고 감독은 시퀀스를 마무리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며, 매끄러운 연결을 위한 쇼트-역 쇼트의 개념이 아니다. 오직 그녀의 시선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선에 대한 답변은 없다. 이 장면은 아사코와 료헤이가 오사카로 가기 전, 친구들이 축하를 해주는 자리에 바쿠가 나타났을 때다. 이때 카메라는 아사코를 중심으로 왼쪽 료헤이와 오른쪽 바쿠의 모습을 비춘다. 이내 아사코는 바쿠의 손을 잡고 나가버린다. 이 때 뒤이어 프레임에 나타나는 쇼트는 두 사람이 나가버리고 난후의 테이블의 전경과 료헤이의 분한 얼굴뿐이다. 실제 이것을 아사코는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것은 아사코의 시점에 대한 응답은 아니다. 필자는 카메라가 바라보는 시점이 잠시 인물과 동일 시 된 후, 그 동일화를 깨뜨린 후에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것이 왜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것에 대한 이유는 관객의 관대함, 조급함에 있을 것이다. 관객은 바쿠를 선택한 아사코의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며, 러닝타임중에서 가장 긴박한 순간이 되기에 그 다음 나열될 이야기에 대한 조급함으로 역 쇼트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이야기는 연결이 되지 않지만 테이블에 앉아있는 인물들의 표정을 보여줬다. 그것이 관객이 갖는 감정과 동일화됐기 때문에 관객은 그것으로 서사를 일단락 마무리 시켰을 것이다. 또한 양쪽을 쳐다보는 아사코는 바쿠를 선택하여 식당을 나갔기에 그에 대한 응답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관객은 그렇다 쳐도, 감독은 왜 단절된 시선을 사용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이 단절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또한, 감독은 상반된 색상의 옷을 입히면서 까지 바쿠와 료헤이에게 비슷한 헤어스타일을 갖게 했을까. 그리고 왜 극의 엔딩은 커플들 중에서 유일하게 아사코와 료헤이만이 엔딩에 이르러 (미묘하긴 하지만)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들었을까?


03.

영화는 분명 두 남자와 한 여성의 사랑 이야기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인물들이 미묘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명하는 것이 보이는 것일까. 영화 <아사코>에서 인물들에게는 반복이 발생한다. 폭죽(혹은 오토바이 사고)과 지진이라는 육체적인 충격 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대표적일 것이며, 쿠시하시의 어머니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사랑에 대한 조언을 해주기도 한다. 두 남녀가 주고받는 반복 외에 다른 반복도 있다. 지진이 일어나고 난후에, 료헤이는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역으로 걸어간다. 그 와중에 공사인부들이 열차는 운행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나 그것을 듣는 이는 료헤이뿐이다. 그는 인부들에게 도움을 받은 후에 감사의 인사를 하며 육교를 내려온다. 그리고 걸어가는 중에 자판기 옆에 울고 있는 여성에게 안부를 물으며 손수건을 건넨다. 그렇게 길을 걷는 중에 료헤이는 우연히 아사코를 길거리 한복판에서 만난다. 마야는 약속시간보다 늦게 와서 아사코와 함께 보기로 한 전시를 보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료헤이의 도움으로 인해 전시를 관람한다. 그리고 아사코에게 버림받은 료헤이를 위해 울어주는 유일한 인물이 된다. 봉사활동을 하던 아사코는 바쿠와 이별을 한 후에 돌아갈 차비를 봉사 활동하는 마을의 어른에게서 빌린다. 단순하게 착한 행동을 한 사람은 그 대가를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계속 보이는 반복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면 자신도 언젠가 도움을 받는 반복 말이다. 이 반복을 통해 영화의 세계에서는 인물들이 연결고리를 잇게 되고 신뢰를 생성한다.


04.

드라마에는 유일하게 신뢰를 깨기만 하는 인물이 있다. 그건 바로 바쿠다. 아사코는 신뢰를 깬 인물이나, 후에는 그것을 이어붙이고자 노력하지만, 바쿠는 다르다. 바쿠는 계속해서 아사코의 신뢰를 저버린다. 그리고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회사와의 신뢰를 저버린다. 아사코의 선택을 받아 이동하던 중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던지며 바쿠는 “날 대신할 사람은 많아”라고 한다. 이 때 아사코는 바쿠에게 갖고 있던 신뢰가 깨짐을 느꼈을 것이다. 하루요, 쿠시하시와 술을 마시던 날 바쿠는 이런 만남을 놓고 ‘운명’이라고 아사코에게 말한다. 아사코는 그런 바쿠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사코는 내심 바쿠를 운명의 사람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헤어지고 다시 나타났을 때, 사랑하는 료헤이를 두고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이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쿠가 대체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은 아사코는 깨달았을 것이다. 운명의 사람은 없으며, 자신도 언젠가 대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아사코가 살던 세계는 반복과 그로인한 신뢰가 유지되던 세상이므로 바쿠는 사라져야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쿠처럼 료헤이를 대하던 아사코의 모습 또한 사라졌을 것이다.


05.

바쿠가 사라지고 아사코의 세계에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인물들만이 남게 됐다. 그런 방식으로 영화 <아사코>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온전히 사람의 감정에만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인 관계 등으로 인해 맺어지고 형성하는 것에 더 치중하여 보여준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사랑을 하는 관계를 보여주려는 이유는 일본사회와 연결 지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일본에 살고 있지 않은 필자가 무슨 배짱으로 이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일본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다만, 필자는 언젠가 료헤이가 더럽다고 표현한 강을 그래도 예쁘다고 말할 수 있기 소망해본다. 바쿠에게 갔던 아사코가 료헤이에게 되돌아갔듯이, 료헤이도 다시 아사코에게 돌아가 더러운 강을 봐도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기를. 술과 커피를 만드는 두 사람에게 펼쳐진 가공되지 않는 강물은 두 사람에게 무슨 영향을 일으킬지 모르겠으나, 영화 속 세계의 질서안이라면 두 사람에게 강물은 언젠가 아름다워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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