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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ul 04. 2021

영화 <송투송> 감상평

멀리 봐야 아름다운 테렌스 맬릭과 감독이 너무 싫은 나.



      영화 ‘송투송’을 봤다. ‘봤다’고 표현을 하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여기서 ‘봤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 안에는 연결성 없는 관념들이 넘쳐나고, 그것들이 단독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은 영화 ‘송투송’이라는 작품을 관객이 이해하도록 설계하지 않았다. 다만 ‘보는 것’, 그 행위만을 하고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기에 애초 영화의 이해의 영역에서 보고, 그 안에서 서사적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감독이 원하지 않는 스스로의 고통에 빠져드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나는 작품을 봤다고 표현한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기재했다.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의 의미는 두 가지다.  시각을 통해 단순하게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이 첫 번째 의미일 것이며, ‘시각을 통해 사실을 인지한다.’는 첫 번째의 개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두 번째 개념이다. 나에게 이 극을 봤다는 의미는 첫 번째 개념이다. 솔직하게 첫 번째 개념으로 이 글의 기조를 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한다. 두 번째 개념으로 발전할 넘어갈 깜냥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페이의 독백처럼 (두 시간 동안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다는 관람의) “경험은 진실인지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각을 통해 단순하게 사실을 인지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영화 ‘송투송’은 나를 버리고 저 멀리 가버렸다. 그래서 그가 시키는 대로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렇게 관람객인 자신을 영화 속에 투영시키지 않고, 너(영화)와 나(나는 나)라는 개념으로 객체화시키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을 했다.

   이 영화는 모든 것이 불편한 영화다. 시간의 흐름은 존재하나, 그 흐름이 뒤죽박죽 엉켜있다.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불친절하다. 단지, 이것이 드라마라고 이해하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착한 내가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불친절함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이 단락을 쓰는 순간이 되서야, ‘송투송’이라는 세계를 가까이 봐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했다. 멀리서 보니, 보이는 것은 두 가지로 구별됐다. 첫 번째,  네 명의 주인공은 유사성을 보인다. 여성 두 명은 목적을 위해 쿡(마이클 패스밴더)을 만났다. 그리고 그녀들이 쿡에게 원하는 것은 서로 달랐다.  쿡과 론다가 생각하는 자유는 서로 다른 것이었고, 론다는 자유(사랑)을 원한다. 그러나 끝내 그것을 얻지 못하자 그녀는 자살을 선택한다. 이에 반해 페니(루니마라)는 뮤지션에 대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쿡이 도와주길 바란다. 하지만, BV와 다시 만나 사랑을 한다.

두 번째, 작품에서는 ‘물’이란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이 물은 마시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들의 몸에 닿는 형태로 출연한다.  ‘물’이라는 것은 쇼트들 사이에서 인물들이 표현하는 사랑의 정서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보조수단일뿐 서사를 위한 것은 아니다.  ‘물’은 페니와 BV의 사랑이 진행되면 될수록 웅덩이, 하천, 바다 등의 형태로 나타나 그들의 사랑이 점차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쿡과 론다 사이에서는 이 물의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오직 론다가 자살하는 과정의 장소로 선택된 것을 이미지로 보여준다. 앞서 나는 이 영화는 연결성 없는 관념의 세계라고 말했다. 과한 의도를 갖고 말하자면, 이 물의 이미지라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관념이다. 론다는 자유를 원한다고 말했지만, 실질적으로 그녀가 원하는 자유는 쿡의 사랑이었다. 그녀의 표현대로 그녀는 자유롭지 못했고, 자신의 사랑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맞이했다. 세계는 그녀가 죽음을 맞이할 장소를 사랑을 가진 마음으로 표현되는 수영장으로 선택한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바라보는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세계 속 인물이 가진 이미지 혹은 내뱉은 대사들이 표현하는 정서들이 서로에게 되돌아간다고 생각했다.  ‘Song to song’이라는 제목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영화는 자신에게서 타인으로, 사랑에서 (사랑 혹은 고통)으로의 움직이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다. 감독은 알 수 없는 대사들이 넘쳐나는 상황 속에서도 쇼트와 쇼트사이의 유기적 관계만을 이용해 생각의 이동을 실현하고 관객에게 이것을 전달한다. 그러나 질문이 생긴다. 그럼 관객인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굿이나 보고 떡을 집어 먹으면 되는 존재인 것인가. 그 감정으로 나는 감독을 욕하면 되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나는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위의 글 전체가 진실인지에 생각했다.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경험이 정말 진실이냐는 것이다. 영화 속에는 특이한 지점이 있다. 론다에게는 쿡과 매춘부와 함께 있을 때의 일이다. 매춘부는 과거 교사였지만, 약혼자가 죽고 난후 뒷목에 문신을 새기고 매춘을 시작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는 론다(나탈리 포트만)에게 자신은 사람들에게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를 팔고 있다고 말한다. 시퀀스의 배치상 이 일이 있은 후에, 론다는 자살을 한다. 론다는 그녀와의 대화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론다는 그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론다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페니가 쿡과 함께 일하기로 결정한 날 BV가 그녀의 뒷목에 키스를 한 것을 말이다. 그리고 론다 또한 웨이트리스 일을 하기 전에 유치원 교사였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 세 명의 여자는 이런 지점을 공유한다. 어찌 보면 그녀들은 남성 캐릭터가 아닌 관객에게 판타지를 팔고 있을지 모르겠다. 더욱이 이 장면은 시간의 불연속성에 있는 장면도 아니며, 서사 속에서 인물들의 유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관객에게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간 영화 세계의 이야기들은 관객은 모르게 구성됐다. 따라서 이 장면은 그 규칙을 어기는 장면이다. 이 세계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인물들의 시간을 쇼트화 시켰고, 그것을 마음대로 재배치했다. 이 여성들은 분명 복수의 형태(신체)를 가졌지만, 그녀들의 정신은 하나로 연결된다. 이것에서 얻을 수 있는 사실은, 내가 보고 있는 프레임의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진짜(Real)와 가짜/ 올바른 것과 틀린 것에 대한 경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봤고, 느꼈다는 감정과 경험이 중요할 뿐이다.

    지금 영화를 바라보는 나의 감정을 비유하자면 이렇다. 이 영화는 디지털 기계로 촬영됐다. 디지털 기계의 촬영은 이어붙이고, 자르고, 연속 지점을 찾는 등의 편리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필름)이 없어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디지털 카메라의 존재는 감독의 시선으로 대체하겠다.) 영화의 편집과 같은 과정은 쇼트와 쇼트 사이로 전달되는 생각의 이동이라 생각될 정도다. 이것을 상기하고 영화를 다시 본다면, 프레임안의 모든 것을 보여줬으나 정말 본 것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에, 이 세계는 물질이 없는 상태를 보여줬다. 그리고 관객에게 경험하도록 만들어내도록 유도했다. 마치, 스스로 편집하고 이해하라는 식으로 관객을 영화의 제작 현장에 참여시켰다는 느낌이 들었다. 앞서 내가 말한 불친절함은 위에 언급한 참여방식의 불친절함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수많은 정념과 메타포를 쏟아내고 나서야 느낄 수 있는 것의 결과물이 불친절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극의 모든 것이 거칠게 느껴졌고, 때로는 이런 태토를 가진 감독의 우월감에 숨이 막히는 경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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