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과 닭의 순서 정하기와 같은
영화 <인톨러런스> GV때 배우 권해효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고 했다. 나는 이 말에 공감한다. 하지만 <인톨러런스>보다 <선라이즈>가 더 이야기의 원형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선라이즈>는 독일 표현주의 시대의 작품이다. 그래서 고민했다. 감독이 중심이 둔 것은 <선라이즈>의 이미지인지, 이야기인지. 그 전에 이야기와 표현은 서로 반대의 지점에 놓여진 것인가라는 질문부터 해야한다. 그러나 이내 이 고민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야기와 표현, 두 가지 중 무엇이 우선이라고 정해야하는 논리의 전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표현과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야 된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정반합의 논리일듯 싶다. (쓰는 나도 뭔가 싶다.) 그리고 이 논리의 대표적인 예로 설명 가능 한 것이 영화 <선라이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조곤하게 그냥 풀어볼까한다. <선라이즈>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말 안에 포함된 똑같은 스토리이므로 특별하게 언급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모임에서의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명제의 토론]이 아니라, [명랑한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영화를 선정했음을 넌지시 밝혀본다.
우선 정반합의 논리라면 A와 B가 필요하다 그리고 도합하면 C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C를 알고 있으므로 괜한 힘을 빼지말고, C에서 A와 B를 찾아보자. 임의로 스토리를 A, 이미지(표현)를 B라고 하겠다. A인 스토리 단순한다. 극은 동화 ‘시골쥐와 서울쥐’와 같이 스토리 구조에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교훈을 섞어넣은 것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 가는 것은 화자다. 무성·흑백영화인 <선라이즈>에서는 인물들의 대사량은 적더라도 특이하게 ‘화자’를 등장시킴으로써 골격을 이끌어 간다.
첫번째 눈에 띄는 화자는 남편과 아내의 아이를 돌봐주는 노파다. 노파는 같은 대사를 두번씩 반복한다. “근심없는 기쁨에 넘치며 아이들과 함께 지내왔다.” 라고 부부관계를 설명해 주며, “그는 지금 도시에서 온 그 여자 때문에 자신 파멸시키고 있으며, 고리대금업자는 농장을 빼앗는다.”라고 이야기한다. 단편적인 영상을 보는 관객에게 인서트 쇼트와 같은 설명을 해주는 역할을 하는 화자이다. 하지만 이 화자는 특이하게 두번씩 위의 문장을 반복한다. 이 불필요함을 감수하면서 문장과 영상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반복되는 자막과 자막 사이에, 해당 자막이 설명되는 영상을 보여주는데, 앞서 나는 달걀과 닭의 순서에 대해서 언급했고, 그것의 순서에 대해 정의내리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니라고 했다. 다만, 이 문장과 영상의 부가적인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이 부분만큼은 영상이 자막을 설명하는 부가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두번째 눈에 띄는 화자는 결말 부분에 등장하는 아내를 구해온 할아버지다. 아내가 죽은 줄알고 실망한 남편이 그녀를 포기하는 사이 “나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곳의 물흐름을 잘알았기에 곶 주변으로 가봤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는다. 나이든 두 남녀는 주인공 남녀보다 지혜로운 이미지를 갖고, 전래 동화와 같은 느낌을 위해 선정된 캐릭터일 것이다. 세번째 화자는 없는 자막을 나눔하는 주연배우들 일 것이다.
또하나 영화를 이끌어가는 스토리의 요소중 하나는 이야기의 구조다. 영화<선라이즈> 구조에 대한 배치는 이분법적인 요소로 그려지면서도 처음의 것으로 돌아가거나, 그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가게끔 짜여진다. 예를 들어 아내는 성녀이고, 내연녀는 악녀로 그려진다는 것. 이것은 그녀들을 잡는 조명의 음영으로 알 수 있으며, 그녀들은 쉽게 도시와 시골이라는 공간적인 배경으로 도치시켰고, 그것을 다시금 음영으로 어두움, 화려함과 밝음, 순수, 지고 지순함이라는 의미로 치환시켰다. 인물에 대한 것 외에 이분화된 소재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분화된 공간의 세계 속에 하나의 공간이 더 추가된다. 그것은 ‘성당’이다. 남편은 아내를 죽이기 위한 시도가 실패를 하고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두사람이 들어간 ‘성당’. 그곳에는 새 출발을 위한 결혼식이 진행중이다. 이 때 자막 쇼트가 등장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 성스런 맺음속에서 믿을 베푸시나니 그녀는 젊고, 경험이 없사오니, 그녀를 인도하고 사랑하소서”라는 것이었다. 이 장면 후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린다. 남성은 구원받고, 여성은 용서를 했다. 그리고 결혼식을 올리는 신부와 신랑보다 먼저 성당을 나와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성당’이라는 공간은 여자의 마음을 되돌리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남자의 마음은 성당에서 되돌려지지 않는다. 그는 그 공간에서 자신의 용서를 구하고 그것을 받을 뿐이다. 남자에게도 유사시점이 있다. 그것은 ‘되돌려진 것을 증명하는 지점’이다. 아내를 죽이려는 손으로 내연녀의 목을 조르는 것과 내연녀가 남자(남편)을 살리고자했던 고랭이 덤블을 아내의 몸에 묶어주는 것이 그의 손이 한 행동이며,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지점이다. 더불어, 두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공통적인 소재는 ‘빵’이다. 두 남녀는 서로를 위해 ‘빵’을 상대방에게 전달한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할 식사를 준비하지만, 남편은 그것을 먹지 않은채 내연녀에게 달려간다. 없어진 남편을 보며 아내는 음식을 먹지 않고, 눈물만 흘린다. 이에 반해 남편의 경우는 특이하다. 남편은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후, 흐느껴우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 들어간 카페에서 그녀에게 ‘빵’을 건넨다. 이 때 ‘빵’이라는 것은 가족의 개념으로 변화한다. 그 후 두 사람은 술과 음식을 마신다. 영화속에서 음식을 주거나 받지 않는행위는 이 부부에게서만 일어난다. 가족이기 때문이 선정된 소재라 할 수 있다.
B로 산정된 표현(이미지)를 살펴보자. 영화 <선라이즈>의 이미지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초반 숲 언덕에서 화려한 도시의 생활을 꿈꾸는 내연녀와 남편의 상상 장면의 촬영은 유명하다. 카메라를 인물보다 높은 곳에 위치 시키고, 미리 촬영된 도시 장면을 영사시켜 두 명의 인물이 미리 촬영된 장면을 보는것을 다시금 재촬영하는 방식이다. 영사를 시킨 화면을 보는 인물과 화면을 재촬영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그때 당시 감독은 갖고있지 않았을 것이나,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면 경외감이 든다. 하지만 뭐 이것도 어찌보면 달걀과 닭의 순서와같은 것은 아닐까싶다. 지금이니까 이런 생각을 할수 있지, 당시에는 영화 상영 당시의 흥행 참패는 감독을 고달프게 했으니까 말이다.
또하나 이미지(표현)은 카메라의 시선이다. 카메라의 시선은 인물의 뒷모습을 따라간다. 내연녀는 숙소의 여주인에게 자신의 구두를 일부러 닦게 하고 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녀와 그가 아내를 죽이기 위해 고랭이 덤블을 꺽으러 간곳엔 발자국이 남녀의 것이다. 카메라는 그것을 천천히 따라간 후, 그들이 하는 행동과 대사를 보여준다. 진흙길이여서 그와 그녀의 구두는 둘다 더러워졌을텐데, 더러워진 구두는 그녀의 것으로만 설정한 것은 남편의 절대적 동조가 없었고, 그의 회개를 암시하는것인지는 알수 없다. 그러나 카메라는 분명 두 남녀의 구두 발자국이 깊게 패인 진흙을 따라가며 그들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독특한 지점은 앞서 말했던 ‘다중노출’에 있다. 내연녀와 남편의 도시의 화려함을 꿈꾸는것과 플롯의 구조가 대칭되게 아내와 남편이 사진을 촬영하고 난 후에 두 사람이 길을 걷는 차도가 꽃길로 변하는 것과 연회장에서 아내와 남편이 머리를 맞대자 위로 겹쳐지는 또다른 연회, 도시의 화려함등이 플롯의 구조와도 대칭되지만, 내연녀는 도시, 아내는 꽃과 풀이라는 것으로 자연스레 이분법적으로 관객에게 매칭시킨는 의미가 있다. 이지점은 <선라이즈>가 스토리를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기도하다.
이 극은 스토리(A)와 이미지(표현,B)가 잘 조합된 동화의 성격을 가진 영화(C)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무엇을 느껴야 할지에 대해 생각을 하다 <선라이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을 감독은 영상의 매체의 장점을 활용해 잘 보여줬다고는 것으로 영화에 대한 단평을 마무리하고자한다. 그저 우리는 재밌게 보고 명랑하게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된다. <선라이즈>는 그런 영화다. 재밌고 명랑하고 유쾌한 그런. 이 성격은 영화가 관객에게 다가가는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감정에 표현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그러한 성격을 장점으로 삼고 관객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 방식은 성공했다. 이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와서 이렇게 이야기되는 것이 그것의 증명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