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제목인 ‘시카리오’란 말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 ‘시카리오’는 예루살렘의 ‘질럿’이며, ‘질럿’은 침략자 로마군을 암살하던 자들이었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의문이 들었다. 감독이 왜 이렇게 친절할까. 그래서 ‘질럿’에 대해 정보를 검색하던 중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질럿’은 의미는 ‘단검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 보내졌던 로마군을 상대하던 예수의 제자들은 단검을 늘 소지했고, 이것에서 유래하여 훗날 신앙을 박해받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됐다고 한다. 단어와 관련된 일화 중 하나는 베드로가 로마군의 귀를 단검으로 자르자, 예수가 로마군의 귀를 다시 붙이고,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할 것’이란 언급도 했다는 것도 있다. 종교를 믿지 않기에 그들은 박해만 받을 줄 알았고, 예수의 시험에만 빠졌던 것인 줄 알았던 그들이 무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이 놀라움은 모순이란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어찌됐든 이 사실을 알고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를 보니 모순과 부조리들이 넘치게 그려진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방향을 제목으로 제시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영화에 대해서 살펴보자. 이 영화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작품 내에서 하고자 하는 주제와는 달리 ‘정확하게’ 양분화 된 양상을 띤다. 두 명의 인물(케이트와 알레 한드로)과 두 개의 이야기(범인의 추적과 멕시코 경찰 가족 이야기)로 나눠진다. 결국 하나의 귀결로 흐르지만, 이 두 인물과 두 이야기는 섞일 수 없다. 결국 극 후반에 도달해도 두 인물은 화합하지 못하고, 두 이야기의 흐름은 하나의 복수를 남기고 끝이 난다. 그리고 영화는 예수가 죽음을 맞이한 3일의 시간보다 하루 더 많은 부활하던 4일의 시간의 낮과 밤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끝을 맺는다. 종교적인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해야겠다. 그러나 ‘시카리오’라는 명칭과 극의 플롯에서 매칭 되는 유사한 지점들이 종교와 결론지어져 흥미로웠다.
작품의 주인공은 케이트 메이서(에밀리 블런트)와 알레한드로(베니치오 델 토르)이다. 인물들은 작전을 진행해 나가고, 목적이 명확하다. 케이트는 ‘범인을 잡는 것’이란 정의로운 목적이, 알레한드로는 ‘가족에 대한 복수’라는, 다른 의도-같은 목적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CIA라는 통제와 질서를 바라는 기관이 존재한다. 알레한드로는 케이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범인을 잡는다는 것은 백신을 찾는 것과 같아.” 그날 케이트는 후레 아즈에서 폭죽을 구경하게 되고, 중간 지도자를 잡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때 아마도 케이트는 알레한드로와 본인은 같은 목적을 갖고 작전에 참여했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백신을 찾는다는 것은 그럴싸한 이야기였지만, 추후에 알레한드로가 새로운 바이러스가 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그 범인을 잡는 이유는 자신의 가족에 대한 복수라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 관객의 집중을 사로잡아 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방법은 정보 노출의 단계화이다. 이 부분은 케이트와 관객 모두에게 해당된다. 케이트는 점차 정보와 상황에 노출되면서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한다. ‘범인을 잡는 것’이라는 정의로운 목적에서 작전은 시작됐으나, 첫날 멕시코에서 본 폭죽놀이라 불리는 소규모의 전쟁을 통해 범인이란 것에 대한 새로운 규정과 인식을 갖게 됐다. 둘째 날 은행에서 돈세탁하며 걸린 범죄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상사에게 법의 울타리가 넓어졌다는 것과 자신은 범인을 뒤쫓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뒤쫓길 수도 있는 존재라는 실존적인 위치의 전도, 셋째 날 만난 알레한드로가 진짜 가진 목적과 그것을 묵인하며, 돕는 정부를 통해 느끼는 정의라는 것의 혼란스러움, 넷째 날 다시 만난 그를 이층 발코니에서 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케이트는 혼란스러움이란 단어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에 휩쓸려 변화하게 된다. 단 4일의 낮과 밤에 일어난 일들이다. 이에 비해 그는 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수를 한다는 것과 백신을 찾는다는 것을 동일화시켜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 자체에 대해 정당성을 찾으려 하고, 더 나아가 영화 초반 케이트에게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중에 이해하게 될 거야’라고 말하며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해 이해받지 못해도 그것을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멧과 알레 한드로에게는 케이트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케이트가 기존 팀장에게 들었던, ‘법의 울타리가 넓어졌다’는 문장에서 그 울타리의 최저 노선이 케이트의 동의라는 것을 최초에 그녀는 몰랐고, 알레 한드로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케이트가 CIA와 알레한드로에게 이용을 당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초반에 벌어진 사건의 범인 잡았고, 그 조직의 생존과 변화를 지켜봤다. 다만, 그 방식이 혼란과 의구심이 혼재되어 그것을 그녀 자신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뿐이다.
이 영화엔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의 결이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는 것을 후반에 알게 됐다. 영화는 범인을 쫓는 케이트와 알레한드로의 모습이 그려지고, 멕시코 경찰 가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가족의 이야기는 이상할 것이 없다. 경찰관인 아버지와 축구를 좋아하는 아들의 모습을 그리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과거 검사였던 알레한드로와 딸의 모습을 투영 시킨 것일 수도 있고, 가족이란 또 다른 주제를 다루고자 하는 감독의 숨겨진 맥락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경찰관인 그는 마약을 실어 나르는 짐꾼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결국 땅굴에서 나온 새로운 지배자에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단순히 죽음을 맞았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와 함께 축구를 하던 아들과 그런 아들을 지켜주는 또 다른 가족인 엄마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알레한드로는 과거 타인이 자신에게 그러했듯 복수심을 경찰의 아들에게 심어줬고, 그 복수의 대상이 됐다. 이것은 영화 초반 후아레스 도시 안에서 시체가 다리에 매달린 것을 보며, 경찰이 케이트에게 과시와 경고의 의미로 시체를 매달았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영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의 성격과 유사하다. 알레한드로에게 경찰을 죽여야 하는 행위는 조용하고 빠른 일처리와 함께 과거 메데인 카르텔과 같지만 조직의 새로운 보스가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더불어 ‘가족’이라는 소재에 대해서는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리뷰하는 나름의 의무감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작품에서는 반복적으로 가족이 등장한다. 작품 초반 멧이 케이트에게 한 질문은 가족이 있는지, 아이가 있는지 였다. 그리고 알레한드로는 가족을 잃고 복수를 결심했다. 중간관리자 마누엘 디아즈가 등장할 때 그의 어린 자녀들이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반대편에 그려지고 있었으며, 카르텔의 보스인 파우스토 알라르콘의 첫 등장 역시 가족과 식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을 떠올린다면 감독이 생각하는 가족(혹은 연대를 가진 무리)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단순히 복수를 하기 위한 원동력 이외의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란 소재가 가지는 의미, 케이트가 느끼는 혼란스러움과 옳고 그름에 대한 경계에선 정의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질서에 대해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러나 총체적인 난관이다. 그것은 이야기를 하는 나조차도 옳고 그름에 대한 규정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 다루는 주제 자체가 흑백논리처럼 정답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 멕시코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했을 까라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 하나만 확실하게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질서, 정의, 목적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규약이라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규약은 균등한 무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당위성을 가진 명제가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산은 산이다’라는 명제처럼 변하지 않는 사실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사회적인 규약이기 때문에 변화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은 케이트가 겪었던 혼란과 혼재를 통해서 맞이할 수 있는 진보 혹은 퇴보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싶다. 앞서 말했듯 이 ‘시카리오’라는 단어는 예수를 지키기 위해 로마군과 맞서 싸웠던, 단검을 지닌 자들이란 어원에서 파생된 것이었기에, 선과 악이란 이분법적 사고로 도출될 수 없는 것에 말하는 영화는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작품에서는 특이하고 알아차리지 못하는 촬영이 존재한다. 첫째는 두 시간 가량 진행되는 이 영화는 대략 4일의 시간을 그린다는 것이고, 그 시간 순서를 밝음(낮, 아침)과 어둠(밤, 동틀 무렵, 해 질 무렵)으로 차례대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인서트 장면이 항공 샷으로 유려하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인서트 장면은 시퀀스와 시퀀스를 잇거나 테이크가 끊겨 이야기의 흐름을 연결할 때 쓸 수 있는 방식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영화는 앞서 말한 대로 시간의 흐름으로만 이동하기에, 인서트 장면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극에서 인서트 장면은 언제나 유려하고 부드럽게 나타나며, 나중에는 그 장면에서 대사 등을 삽입해서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처음 후안레즈로 떠나는 항공기를 그림자로 잡아주던 장면은 비행기가 작아졌음에도 그 흐름을 끊지 않고, 항공 샷으로 멕시코로 넘어가는 것을 연결하여 보여준다. 그리고 비행기의 외관에서 멕시코 땅을 보여주던 카메라가 항공기 안으로 들어와 기장과 부기자의 소매 끝자락을 가리키며 인물들의 이야기를 또 다시 시작한다. 끝부분 장면이라 여겨졌던 부분이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되는 장면이다. 영화 속에는 이런 인서트 장면이 항공 샷과 연계되어 자주 등장한다.
이 인서트 장면과 같이 부드러운 연결방식은 방식은 알레한드로를 조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관객은 초반 주인공이 케이트임을 인지한다. 그리고 그녀가 겪게 될 미지의 일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다. 그러다가 신비하게 등장한 인물인 알레 한드로에게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3일 후면 전부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말하며 알려주는 시퀀스에서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했음을 관객은 인지한다. 그 남자에게 3일이란 시간은 케이트에게 범인을 잡을 수 있는 시간이며, 멧이 말했던 케이트가 그들(멧과 알레한드로)에게 기회를 줄 시간이 3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케이트가 잡아야 할 인물과 남자가 복수를 해야 할 대상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케이트는 끝까지 알지 못한다.
새로운 중심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관객은 캐릭터들의 이해관계를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관객 또한 케이트와 같이 알지 못했다. 그 이해관계에서 오는 모순이 관객 자신의 골치가 아프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알레 한드로는 ‘의문의 남자’라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새로운 화자, 주인공)를 갖고 관객에게 다가왔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새로운 의미와 장면의 연결방식은 관람 내내 인지하지 못했던 부드럽고 매끄러운 부분들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인서트 장면의 유려함과 목적지 알 수 없지만 이동만을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초반 정보 삽입의 장면들을 보면서 드라마요소인 서사적 흐름이라는 의미 외에 알레한드로와 변화를 겪는 케이트의 여정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영화의 특정 영상은 인상 깊다. 동틀 무렵과 해 질 무렵의 노을 지는 장면은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땅굴에 들어갔을 때 적외선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보인 초록과 검정, 그리고 화면의 반전 등도 좋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1:27:42초부터 1:28:00초까지 이뤄지는 암전 된 화면 속 모든 것이 뒤섞여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상태는 믿는 것은 팀원(혹은 가족) 뿐이라는 사실. 카르텔과 미국의 상황 혹은 인물들과 무리들이 겪는 상황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무엇인 옳은 것인지, 그 기준은 무엇이고, 누군가가 정했는지 등에 대한 의문, ‘당했으니 갚는다.’라는 원시적인 논리, 통제되는 과거 상황으로 돌리고자 하는 나름의 정제 능력 등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영화라는 매체에서 관객에게 감각적으로 보이는 화면을 통해 보이는 것 이외의 것이 존재할 수 있음을 알려주고, 그것을 보여주고자 한 땅굴로 잠입하는 장면에서 이런 영상을 삽입한 것은 아닐까라는 과한 생각도 했다.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다. 관람 후 생기는 오묘한 감정은 생기고, 이런 생성된 감정은 표출되지 못한다. 감정의 표현은 대상이 존재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조직의 보스가 된 알레한드로에게 그 감정의 대상으로 결정하기에는 그는 질타 받을 이유가 빈약하고 심지어 감독은 그 캐릭터를 부박하게 그리지 않았다. 더불어 영화 초반 알레한드로에게 케이트는 하나의 수단이었으나 영화의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에게 그녀는 연민이라는 감정의 대상이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했다.
영화 초반 이뤄진 회의에서 사람들은 케이트가 적합한 인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적합성은 관객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을 것이다. 감정의 혼란을 고스란히 간직해줄 사람, 유일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눈물 흘릴 줄 알고 (기준, 정의 등의) 변화에 대해서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로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