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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피셜 지오그래픽 Aug 24. 2021

"행복은 내가 가꾸어가는 시간 속에서만 존재"

알피니스트 정승권이 人生의 山을 오르는 법


1993년 겨울, 정승권(62)은 높이 320m 설악산 토왕성 빙폭을 로프 없이 도끼 두 자루만 쥐고 올라갔다 내려왔다. 얼음에 박힌 2센티미터의 날 끝에 목숨을 건 채. 고드름을 혀로 핥아 목을 축이며 숨소리조차 조심했다. 이 여섯 시간의 사투는 한국 등반사에 전설이 됐다.


암벽, 빙벽, 거벽을 섭렵한 토탈 클라이머


산의 개수라든가 높이 따위의 숫자놀음으로 산악인을 평가하는 것은 퍽 불편한 일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이런 얘기를 꺼낼 때면 으레 과거 경력의 힘을 빌리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산악인 정승권의 경력이 빛나는 것은 그의 등반이 모든 영역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미세한 감각과 동작을 요구하는 암벽, 가변(可變)하는 얼음을 이해하고 능숙하게 다뤄야하는 빙벽(氷壁), 인공 장비를 사용해 며칠씩 등반하는 거벽(巨壁) 등 전 분야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이는 자에게 토탈 클라이머(total climber)라는 칭호가 붙는다. 등반의 탈(脫)장르를 실현하고, 나아가 교육 능력까지 보인 사람으로서 정승권이 독보적이라고 정평이 나있다.


그는 1990년 전국클라이밍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기세를 몰아 미국에서 열린 국제빙벽등반대회에서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등반가들과 겨뤄 준우승을 했다. 그 무렵 높이만 무려 1천미터에 이르는 미국 요세미티의 수직화강암 ‘엘 케피탄(El Capitan)’을 등반, 한 평 남짓한 허공 침대에서 말그대로 '먹고 자고 싸며' 자신만의 등반 기술을 완성한다. 이 외에도 알래스카·파키스탄·알프스·파타고니아의 고산거벽을 오르며 한국 알피니즘의 최전선에 선다. 스무 살에 도봉산 선인봉에서 세계의 산을 오르는 산악인이 되겠노라 호연지기를 다진 청년 정승권의 꿈은 그렇게 현실이 되어갔다.


“88년에 올랐던 에베레스트.”

우문(愚問)을 던진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잠시, 인생에서 단 하나의 등반을 꼽아달라는 요청에 곧장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서울올림픽을 기념하여 꾸려진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뽑혔다. 동갑내기 엄홍길도 이때가 첫 등정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안나푸르나 등반을 끝으로, 그는 한창 불붙은 히말라야 8000m 14좌 등반 경쟁에서 빠진다.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에서 재차 제안을 받았을 때도 순간 욕심이 났지만 깔끔하게 거절했다. 수십 명의 대원과 셰르파, 배후 스폰서 간에 이해관계가 부딪히는 고산 등반 스타일이 그와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예민함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승권씨가 젊은 시절 프리 솔로(free solo)로 올랐던 토왕성 폭포를 배경으로 앉아 있다.


예민한 감수성이 싫지 않은 '헤라클레스'


다부진 체격에 장사(壯士)같은 힘으로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내면은 사실 예민한 감수성으로 채워져있다. 등반 중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는 썩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고백한 이것은 다른 방면으로 제 몫을 톡톡히 치러주었으니, 매체에 실린 다수의 등반기가 이를 증명한다. 그의 본디 신분이 알피니스트인지 에세이스트인지 헷갈릴 만큼 대자연에서 벌어지는 치밀한 감정 묘사가 예사롭지 않다. 1993년엔 <토왕의 환상>으로 한국산악문학상을 받았다.


후배들 앞에선 노산 이은상 선생의 <산악인의 선서>를 중저음으로 멋들어지게 주창하는 기백을 지녔는가 하면, 한 잔 들어가면 손바닥만 한 우크렐레를 퉁기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산노래를 즐겨 부르는 낭만도 갖췄다. 산을 벗어나면 말을 아끼는 편이다. 이렇듯 선배 세대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후배에겐 친절을 베푸는 정승권은 기술뿐만 아니라 문화를 전수하는 산악인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 2001년에는 설악산 소토왕골에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암벽 루트를 개척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브릿지 오버 트러블 워터(Bridge Over Troubled Water)’를 듣고 붙인 이름이지요.”


가장 좋아하는 산악문학은 장 꼬스트의 <알피니스트의 마음>이다. 22살의 젊은 나이에 장 꼬스트가 죽은 후 그의 등반일기를 아버지가 찾아내어 책으로 엮은 것인데,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진 않지만 산을 사랑했던 꼬스트의 청순함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이런 구절이 생각나네요. ‘사람들과 산을 올랐다. 나는 새 장난감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무작정 웃고 떠들었다. 미칠 것만 같은 즐거움이었다...’”


알피니스트에겐 죽음마저 감동의 절정


알피니즘(Alpinism)이 지난 해 12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국제산악연맹을 중심으로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 3국이 10년 동안 노력을 기울인 끝에 거둔 성과다. ‘육체적·기술적 능력을 발휘하여 높은 산과 절벽을 오르는 행위’로 정의되는 알피니즘은 산에 대한 지식과 전통, 가치관을 포괄한다. 알피니즘에 대한 정의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그는 극도의 어려움을 추구하는 것이 진정한 알피니즘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알피니즘이란, 아름답고 자연적인 등반선을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협동과 사랑으로 오르는 것, 그것뿐이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돌아갈 수 있다면 예전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지.

“지금의 삶의 경험이 유지된 채라면 젊음으로 돌아가고 싶지요. 하지만 당시 젊음으로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살아오며 얻은 소중한 추억의 시간들이야말로 삶의 가치이고 또 그런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집중력과 에너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도 뒤따랐고...”

한 가지만 더 물었다. 수없이 죽음을 맞닥뜨린 그에게도 죽는 게 여전히 두려운지.

“우리의 삶은 기, 승, 전, 결이 있어야죠. 그래서 사람들과 서로 감동을 주고받는 것이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 죽음도 감동의 절정일 겁니다.”


1990년 그는 본인의 이름을 건 ‘정승권등산학교’를 열었다. 인터넷도 없고 등반인구 자체가 희박하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상이요 대담한 도전이었다. 그가 너무도 사랑했던 산에 남을 수 있으면서도 그보다 더욱 사랑했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타협안이었다. 시간은 흘러 약 3천 명이 그가 만든 등산학교를 졸업했다. 어떻게 하면 남의 인생이 아닌 나의 인생을 살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스스로 목표를 정했으면 한눈팔지 말고 죽을 때까지 가야 해요. 행복은 내가 가꾸어가는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산악인 사이에서 설화처럼 떠도는 장문의 시 '설악산 얘기(진교준, 1958년 作)'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었다.


나는 산이 좋더라.

영원한 휴식처럼 말이 없는

나는 산이 좋더라.

꿈을 꾸는 듯

멀리 동해가 보이는

설, 설악, 설악산이 좋더라...


마침 그가 입은 옷 색깔이 푸른 동해를 닮아있었다. / 글·사진 남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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