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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피셜 지오그래픽 Jul 11. 2021

바위에 새기는 헌시

그곳에 서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 신동엽이 생전에 암벽등반을 즐겼다? 1961년부터 피톤산악회에서 활동한 그는 교편을 잡은 문인이면서 동시에 자일을 감아쥔 열정적인 클라이머이기도 했다. 북한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백운대(836m) 남벽에는 시인 신동엽길 있다. 전문 장비를 갖춰야만 오를  있는  길은, 문학도 김기섭(59)씨가 1993 개척하여 자신이 흠모하는 시인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렇듯 개척자가 자신이 개척한 루트에 이름을 붙이게 하는 관행은 우리나라 근대 등반의 역사가 태동된 1930 이래 어엿한 산악문화로 자리 잡았다. 혹자는 이를 두고 ‘바위에 새기는 헌시라는 표현을 남겼다.


도봉산 무수골에서 산악회 회기 앞에 선 신동엽 시인(가운데) (사진: 신동엽문학관)


한국 알피니즘의 요람, 북한산 인수봉(810m)에는 80여개, 선인봉(708m)에는 50여개의 루트가 있다. 바야흐로 60-70년대, 개척자 본인 또는 소속 산악회의 이름을 걸고 개척이 한창 이루어졌다. 예컨대 ‘취나드길’은, 아웃도어 의류브랜드 ‘파타고니아’의 설립자로 유명한 미국인 이본 취나드(1938~)가 1963년 한국에서 군복무 도중에 개척한 길이다. ‘연대베첼로’라는 다소 즐거운 운율을 가진 이름에는 1968년 연세대학교 산악부 출신 미혼남(Bachelor)들이 만들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의대길’는 어떠한가. 말그대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산악부원들이 1971년 여름 방학을 맞아 개척한 길이다. 이외에도 요델길·크로니길·동양길·현암길·빌라길을 위시한 인수 선인의 대표 루트들은 각각 요델산악회·크로니산악회·동양산악회·현암산악회·마운틴빌라산악회 등 고전산악회가 남기고 간 족적이다. 장비가 열악해 군용 워커 따위를 신고 절벽에 매달려 쇠못과 볼트를 설치한 개척자들의 애환이 서려 있다.


1963년 인수봉 앞에 선 파타고니아 설립자 이본 취나드와 한국인 친구들 (사진: 선우중옥)


그런가 하면 다분히 서정적인 이름도 있다. 옛말에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했던가. ‘심우(心友)길’은 마음으로 깊게 사귄 벗이라는 뜻으로, 이는 개척 당시 회원들의 끈끈한 우정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갈라져 있는 바위틈에는 ‘하늘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등반하는 이로 하여금 창공을 나는 기분을 들게 한다. 정적이 흐르는 ‘고독길’을 오를 땐 으레 고독한 감상에 젖기 마련이며, ‘은벽(銀壁)길’에 서면 정말이지 은빛 반짝이는 바위가 나를 맞이하는 것만 같다. 산사람의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봉산 선인봉 하늘길


설악산을 빼놓을 수 없다. 야영장의 18번곡 ‘설악가(중동고 산악부 이정훈 1970년 作)’와 지금까지도 등반가 사이에서 낭독되는 ‘설악시 얘기(서울고 2학년 진교준 1958년 作)’를 미루어 볼 때 등반가에게 설악산의 의미는 인수봉 못지않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설악산에는 국내에서 가장 큰 바위인 울산암과 장군봉·미륵장군봉·적벽이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높은 빙벽인 토왕성폭포와 대승폭포·소승폭포가 있어 히말라야와 알프스를 꿈꾸는 이 땅의 숱한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꿈을 키워나갔다. 그중에서도 네이밍의 최고봉은 과연 암릉 구간이다. 설악산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암릉이 많다. 등반가들은 푸른 동해를 옆에 끼고 미답의 산능선을 따라 걸으며 하나하나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 ‘별을 따는 소년들’ · ‘솜다리의 추억’ · ‘몽유도원도’ · ‘삼형제길’ ···.


한편의 시를 위한 길 (사진: KBS 열상앨범 산 캡처)


이러한 작명의 행위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는 높이만 무려 1km에 달하는 수직화강암 ‘엘 케피탄(El Capitan)’이 있다. 전세계 암벽등반가에게 꿈과 같은 그곳에도 수십 년 전 말 없는 바위와 영혼의 대화를 나눴을 개척자의 땀과 피가 배어있다. 과연 대국(大國)다운 작명이 마치 대서사시와 같다. ‘씨 오브 드림스(Sea of Dreams)’ · ‘퍼시픽 오션 월(Pacific Ocean Wall)’ · ‘뉴 던(New Dawn)’ · ‘로스트 인 아메리카(Lost in America)’ · ‘레티센트 월(Reticent wall)’ ···. 꿈과 바다, 새벽, 방황, 침묵의 심상은 국경을 넘어 모든 등반가의 마음에서 피어난다. “등반의 시작은 낭만적 상상”이라는 폴란드 등반가 보이택 쿠르티카(1947~)의 말을 곱씹게 된다. 세상의 모든 등반가여, 그대들이 정녕 낭만파 시인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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