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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의 편에 서서

어쩌면 기억이란, 의도적으로 새겨 넣는 가장 정교한 예술이 아닐까

by PureunDal Archive

"하나의 작은 행복을 기억해 두어라. 그리고 그 행복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때, 그 기억을 사용해라."

-앙드레 지드 (André Gide)-

뇌리에 박히는 기분 좋은 향기를 맡았던 순간, 아름다운 붉은 노을을 바라보던 순간,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차 한 잔에 위로받았던 순간. 우리에게 진정한 휴식을 선물했던 그 감각들은 왜 그리 쉽게 우리를 떠나가는 걸까요. 애써 되찾은 평온은 잠시를 넘기지 못하고 다시 일상의 소음에 휩쓸려 머릿속에서는 흔적도 없이 흩어지곤 합니다.

우리의 뇌는 본래 긍정적인 기억보다 부정적인 기억을 더 선명하고 잘 기억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쾌락의 순간보다 위협의 순간을 더 강렬하게 오래 간직해야 했던 진화의 흔적이지요. 가만히 내버려 두면 우리의 마음은 좋았던 기억보다 불안했던 기억의 퇴적층 위에 서 있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좋은 경험을 한 뒤 의식적으로 그 여운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순간의 감각을 내면 깊숙이 각인시키는 이 정교한 기술을, 우리는 '머묾(Lingering)'이라 부릅니다.

'머묾'은 예를 들어 이런 과정입니다. 비어 있는 잔에 좋아하는 차를 따르는 '채움'의 과정이 끝난 뒤, 그 찻잔에 남은 온기와 향을 가만히 음미하는 일련의 행위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음미하기(Savoring)'라고 부릅니다.

이는 흩어지는 감각에 '의미의 닻'을 내려, 기억이란 항구에 단단히 정박시키는 일입니다. 이 의식은 거창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내리는 아주 일상적인 루틴을 생각해 봅시다. 커피의 향을 음미하고 온기를 느끼는 것이 '채움'이었다면, 잔을 내려놓은 뒤 잠시 눈을 감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순간이 바로 '머묾'의 시작점입니다.


"아, 이 좋은 향이 오늘 나의 하루를 함께 해주겠구나." 커피가 남긴 기분 좋은 각성 상태와 입안의 여운, 그 긍정적인 감각이 내 안에 스며드는 것을 10초가량 가만히 느껴보는 것. 이 짧은 순간이 더해질 때, 커피를 마시는 행위는 단순한 습관에서 '나의 하루를 여는 소중한 의식'으로 격상됩니다.

‘비움’이 소음을 덜어내는 과정이고, ‘채움’이 좋은 감각으로 채워 넣는 과정이라면, ‘머묾’은 그 좋은 감각을 시간 속에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온점과 같습니다. 우리는 정서적인 휴식을 위해 주말을 기다리거나, 특별한 휴가를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아침의 커피 한잔, 창문으로 스며들어 오는 햇살, 좋아하는 음악 한 소절. 이 모든 것이 '머묾'의 기술을 통해, 언제든 원할 때 기댈 수 있는 우리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줄 것입니다.


흩어지는 순간 닻을 내릴 때, 비로소 우리의 쉼은 시간을 이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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