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by 길벗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 류시화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보게 되는 선물...


표현이 기가 막힌다.

'주옥같다'라는 표현조차

이 시에는 식상해 보인다.


말 많은 우리 세상을 생각해 보게 된다.

의미도 영혼도 감흥도 전혀 없는

공허한 말 말 말......

어떤 말은 세상을 이롭게 하기는커녕

세상을 갈라놓기도 한다.

귀를 씻고 싶은 혼탁한 말 대신

가끔, 아주 가끔이라도,

단 한 마디라도

울림이 큰 말을 듣고 싶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단어 하나에서 왈가왈부 시시비비가

시작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단어 하나라도

허투루 쓸 수가 없을 듯하다.

단어 하나라도

소중히 다뤄야겠다.

시인처럼

따듯하고 긍정적인 상상력으로

단어를 사용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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