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늘 아래서 옷깃만 스쳐도 정분 날 만한, 바람나고 싶은 봄날. 봄바람 재우기엔, 아니 차라리 바람나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 내가 수도권 최고의 봄 풍경이라고 예찬하는 용인의 호암호수와 호암미술관이다.
잔뜩 찌푸린 날씨 속에서도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아니 보이는 그 이상으로 행복에 겨워했을 것이다. 호수 건너편 산에는 짙은 안갯속을 뚫고 산벚꽃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길가에는 왕벚꽃이 도열해 있다. 소박한 개나리와 진달래도 벚꽃 천국에서는, 벚꽃의 후광 속에 보석과도 같이 빛나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환상적인 풍경 앞에 더 이상 무얼 바란다는 건 욕심일 뿐이고, 이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건 순백의 풍경에 티끌이란 생각이 들었다.
서울의 벚나무들이 '벚꽃 엔딩'을 고할 무렵, 경기도 용인의 호암호수 일대에는 벚꽃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처인구 포곡읍 가실리, 지역 이름을 따 '가실 벚꽃'이라고 한다. 영동고속도로 마성 IC에서부터 에버랜드와 호암호수를 거쳐 호암미술관까지의 왕벚꽃 터널이다. 하이라이트는 미술관 앞 호암호수 주변과 호수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다. 호숫가 벚나무는 거칠 것이 없다. 온 산을 차지한 데 이어 호수까지, 아니 사람의 마음까지도 차지한다.
하루 전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표를 예매했다가 취소하고, 다시 '맑음'을 믿고 재예매했다. 4월 11일(토) 아침, 우중충한 하늘을 보고 예보가 또 빗나갔음을 알았지만, 이 또한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길을 나섰다. 문을 열기도 전인 9시 반 호암 미술관에 도착해 전시 중인 '김윤신 : 합이합일 분이분일'을 30분간 관람하고, 전통 정원 <희원>을 한 시간여 둘러봤다.
* * 나들이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날씨다. 꽃이든 단풍이든, 제아무리 절정이라 하더라도 흐린 날은 감흥이 별로다. 시든 꽃, 시든 단풍이라 할지라도 햇살 머금으면 열 꽃, 열 단풍 부럽지 않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반짝이는 봄 햇살을 기대했건만, 아쉽기 그지없다. 대신 가을 단풍철이나 내년 봄에 다시 찾을 구실을 찾았다.
<김윤신 : 합이합일 분이분일>
김윤신 작가의 70여 년 작업을 조망하는 회고전이다.
핵심은 나무를 '재료'로만 보지 않고 작가와 재료가 하나가 되는(합) 작품이라는 것,
그럼으로써 또 다른 하나가 탄생(분)한다는 것이다.
'희원'에서는 또 다른 봄이 펼쳐진다. 벚나무와 함께 살구나무, 조팝나무, 명자나무 등 다양한 꽃나무와 돌단풍, 양지꽃, 제비꽃 등의 야생화가 곳곳에 어우러져 있다. 그야말로 봄꽃의 향연이다. 정원 곳곳에서 조경의 품격이 느껴진다. 연못과 정자도 자리하고 있고, 경복궁에서 보았을 법한 꽃담, 신라시대 석탑과 불상, 이름 없는 석공들이 만든 석등과 물확, 벅수 등 다양한 석조물이 배치돼 있어 산사와 고궁을 거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디에 서 있든 담 너머 산벚꽃 동산과 호수 일대가 한눈에 들어와, 시원하고 그윽한 눈맛을 선사한다. '취경' 또는 '차경(借景)'이라 하여 자연 경관을 정원 안으로 끌어들이는 심미안이 돋보인다. 특히 호암정 앞 연못에서 바라본 앞산은 감탄을 자아낸다. 하얀 눈이 소복 쌓인 듯한 이색적인 풍경 앞에서 몇 번이고 셔터를 누르게 된다.
산사의 고즈넉함과 고궁의 격조를 함께 품은 전통정원 '희원', 그리고 호암미술관의 전시까지 감상하고 나면 호사가 넘치는 듯하다. 호암호숫가의 벚꽃과 미술관이 어우러진, 눈이 시릴 만큼 봄이 가득한 풍경. 해마다 이 무렵이면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열병처럼 도지는 계절의 최고 여행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