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 세 번째다. 감흥이 새로웠다. 몇몇 구절은 널리 알리고 싶어졌다.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한 명문장이요, 우리의 문화유산 감상법이 될 수도 있어서다. 책의 저자는 혜곡 최순우(1916~1984).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역임한 미술사 학자다. 몇 권의 저서가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유물 해설에 빠짐없이 그의 글이 등장한다. 감히 내가 언급할 위치는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 것에 대한 지나친 미화나 과장 같은 문화적 국수주의 경향을 보이는 혜곡 선생의 글이 거북할 때도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될 수밖에 없는 외국의 성이나 궁궐, 성당 등과의 비교에서 갖게 되는 우리 것에 대한 열등감 대신 그의 글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글은 너무나 명징하고 정감 어려 건축, 도자, 회화, 공예, 불상과 석탑뿐만 아니라 우리 한글도 훌륭한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대표적인 글이 '하늘빛 청자'를 풀어낸 문장이다.
"비가 개고 안개가 걷히면 먼 산마루 위에 담담하고 갓맑은 하늘빛이 산뜻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하늘색의 미묘한 아름다움은 곧잘 청자의 푸른 빛깔에 비유되어서 '우후청천색(雨後晴天色)'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마치 고려 사람들의 오랜 시름과 염원, 그리고 가냘픈 애환을 한꺼번에 걸러낸 것만 같은 푸른빛, 으스댈 줄도 빈정댈 줄도 모르는, 그리고 때로는 미소하고 때로는 속삭이는, 또 때로는 깊은 생각에 호젓이 잠겨 있는 이 푸른빛이 자랑스러워 고려 사람들은 비색(翡色)이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이렇게 풀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으로서의 깊고 맑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인체 사실(寫實)의 원숙한 조각 솜씨와 오묘한 해화(諧和)를 이루어 주는 데에 있다. 슬픈 얼굴인가 하고 보면 그리 슬픈 것 같이 보이지도 않고, 미소짓고 계신가 하고 바라보면 준엄한 기운이 입가에 간신히 흐르는 미소를 누르고 있어서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함을 뼈저리게 해 주는 것이 이 부처님의 미덕이다."
책의 제목이 된 부석사 무량수전은 또 어떤가. 감히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었다. 무량수전 안양문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나는 오래된 절집을 찾으면 내가 혜곡 선생이 되어 느긋하게 둘러본다. 어느 해 서산의 개심사를 둘러보고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개심사는 꽃도 꽃이지만 절집도 아름답다. 절을 위해 화려한 나무가 우거진 게 아니라 숲을 위한 장식물인 양 절집의 고색창연함이 돋보인다. 경내의 건축물은 삐거덕 소리가 날 것 같은 고풍스러움과 단아함을 간직하고 있어 옛 시골집 같은 정감이 넘친다. 그래서일까, 중생들의 영혼을 안온하게 다독여주는 묘한 격조가 느껴진다. 불심이 없어도 위로받을 일이 없어도,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마음이 씻기고(洗心) 열리는(開心) 듯한 심상치 않은 기운과 고즈넉함이 절집은 물론 뒷산에까지 배어 있다."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정조 때의 문장가 유한준(1732~1811)의 글이다. 알게 되면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제대로 본다는 뜻이다. 우리 옛 것을 찾을 때 미리 알고 가면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고려청자, 조선백자, 후불탱화, 배흘림기둥, 팔작지붕 같은 조금은 이론적이고 전문적인 것도 공부하고 가면 좋겠지만 현장이든 글이든 자주 접함으로써 스스로의 안목을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최순우2008학고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