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무난하고 별다른 약속 없는 날이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아내와 내 머리가 복잡해진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우리는 주로 물가로 간다. 걷기 편하고 맛집이 즐비해 아내가 선호하는 까닭이다.
4월 29일도 그랬다. "하늘빛이 참 곱네, 꼭 엊그제 다녀온 청평 호반이 생각나네..." 아내가 넌지시 등을 떠민다. 우리 집 코앞이 석촌호수고, 거의 매일 호숫가를 한 바퀴 도는 아내의 선택지는 오늘도 호수다. 아내는 봄기운이 시키는 대로, 나는 아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경기도 양주의 기산 저수지로 행선지를 잡았다.
호반에 들자 보이는 건 온통 초록이다. 하늘도 물도 산도 숲도 모두 편안함을 안겨주는 색감이다. 바람에 물결이 일렁이자 나무 데크길이 흔들리는 게 마치 거룻배를 타고 유유자적 노니는 듯도 하다. 산책로를 조성한 지 얼마 안 되는 기산 저수지 둘레길은 1.7km. 시종일관 오르내림 없는 데크길이다. 걸음을 아껴 아주 천천히 걸어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기산 저수지는 출렁다리로 널리 알려진, 9km 떨어진 마장호수의 위세에 가려져 찾는 이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어 근처의 장욱진미술관과 권율 장군 묘역 일대를 둘러봤다. 작품 감상을 떠나서라도, 장욱진 미술관은 산책 삼아 한 번쯤 들러볼 만하다. 가족 나들이객들이 즐겨 찾는다. 안으로 들어서면 너른 잔디밭 위에 각양각색의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다. 잔디밭과 숲, 온통 초록 세상 속에 저 홀로 하얗게 서 있는 미술관은 무논에 서 있는 백로처럼 도도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알고 보니 국내외 여러 건축상을 받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장욱진(1917~1990) 화백의 작품 세계는 시골 초가집 · 강아지 · 소 · 새 · 산 · 나무 · 해 · 달 등을 주제로, 동심적이면서도 해학적인 독특한 화풍을 보여준다. 그가 바라보는 대상은 "나는 심플하다"라는 말처럼 모두 단순하고 간결하다.
미술관에서 별도의 문이나 절차 없이 바로 이어지는 권율(1537~1599) 장군의 가족 묘역도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알다시피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지휘한 도원수다.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대승을 거둔 장군답게, 사후에도 걸맞은 예우를 받고 있는 듯하다. 왕릉에 준하는 규모다. 수려한 자연환경이 감싸고 있는 양주 시립 장욱진 미술관과 권율 장군 묘역은, 그저 한 바퀴 휘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잿빛 콘크리트 건물에 익숙한 도시 사람들에게는 숲도 건물도 공기도 감동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