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
"삶은 현실이야!"라고 말해주던 선배가 있었다. 여기서 현실이란, 삶을 이어주는 수단을 의미했다. 선배는 이제 세상을 떠나셨지만 당시엔 '저런 당연한 말을 왜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인생을 살아갈수록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와닿는다.
내가 여러 가지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며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나눔 사업을 하려고 했을 때, 주위의 많은 지인들은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기보다 "뭐 먹고살려고?, 아이들은 어떻게 키울 거야?"라는 걱정을 먼저 앞세웠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 말들이 한창 의욕이 충만하던 나에겐 짜증만 자아내게 했다.
아무렴 산 입에 거미줄을 칠까! 나는 뜻한 바가 현실과 동떨어졌든 말든 옳은 일이라 생각했기에 앞만 보고 달렸다. 걱정하며 나의 걸음을 지연시키는 가족, 가까운 지인들을 멀리하며 앞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던 그들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지원군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말이다.
현실이라는 그 말은 곧 한 인간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 잠 잘 곳을 의미한다. 가끔 기차역에서 노숙하시는 분들을 만난다. 그들은 구걸한 돈으로 우선 먹을 것을 구한다. 물론 술과 담배를 먹을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술, 담배보다 최소한이라도 허기를 채울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을 보았다.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의식주 문제는 기초적이고도 중요한 문제다. 돈이 있다고, 명예가 있다고 의식주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에게 걸맞은 의식주를 해결하려 하고, 직책이나 명예에 따라 그것에 걸맞은 의식주를 누리고자 한다.
언젠가 모기업의 계열사 임원인 한 사람이 거래처와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있었는데 그의 고급 차량이 접촉사고로 흠집이 나서 수리업체에 맡기는 일이 있었다. 계열사 임원은 회의에 자동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데 애용하던 차가 없음으로 다른 차량을 물색하는데 꽤나 시간을 경유했다.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고 회사엔 다른 차량들이 얼마든지 있었음에도 비서직원을 통해 자신의 체면을 유지할만한 자동차를 구하는 것을 보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위치에서 그와 걸맞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구나를 깨달았다.
내가 현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생의 새로운 계획을 설계하려고 하니 때는 이미 늦은 것 같다. 연식이 지난 자동차처럼 엔진의 힘을 잃은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을 탔을 때 누군가 내게 자리를 양보하면 자존감이 1%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양보받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안도감을 느끼는 나를 마주할 때 나는 자존감이 10% 내려가 있음을 감지한다.
내가 지금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은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것도 환갑을 향해 가고 있으니 말이다. 환갑의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아니 내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우리 또래 지인들이 거의 공통된 고민에 빠진 것 같다.
현실이라는 것은 나이가 먹었다고 해서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닌 시대가 되었다. 과거시대처럼 노인이라고 자식들에게 더부살이가 가능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젊어서 부지런히 일해 겨우 내 집 장만을 했다손치더라도 현실은 속수무책이다. 그러고 보니 현실은 전쟁터 같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그러기에 더더욱 마주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