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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eong Feb 26. 2024

인간의 조건 3

때늦은 후회

외할머니의 후회

어느 날 팔순을 훌쩍 넘기신 외할머니께서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인생을 너무도 어리석게 살았노라고, 그래서 후회스럽다고 말이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후회스러우시냐고 여쭸다.

외할머니가 후회하는 것 중 첫 번째는 외할아버지와 혼인한 게 제일 후회스럽다고 하셨다.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 당시 외할아버지는 20년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외할머니의 후회와 한탄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이해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후회하는 것은 고된 시집살이와 구박을 당하면서도 시집에서 도망치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고 하셨다.

세 번째 후회는 살면서 억울한 소리를 듣고서도, 여자라고 차별을 당하면서도 반항 한번 못하고 입바른 소리 한번 못한 것이라고 하셨다.




나의 외할머니는 1917년생이시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외할머니와 내가 마지막 나눈 대화는 지금부터 20여 년 전 이야기다.

 20여 년 전 외할머니께서는 증손주 첫돌 기념일에 오셔서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 가신 적이 있다. 할머니는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는다며 잠자리에 누워서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할머니는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처럼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때 이야기를 들으며 웃다 울다 했던 기억이 난다.

 외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서 6.25 전쟁을 지나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DJ정권과 MB정권 때까지 생존하시다 2011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향년 94세까지 세상에 있는 동안 겪어보지 않은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모진 세월을 살아내신 분이셨다.




아픈 세월의 기억들

외할머니는 열일곱 살 때 서른 살 노총각과 혼인을 하셨단다. 양반집 맏딸이었지만 몸매가 왜소하고 약골 체질이다 보니 시집을 어찌 보내나 걱정이 된 외할머니의 부모님께선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물었는데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와 인연을 맺어야 단명하지 않고 명줄을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찾고 찾던 중에 일제에게 끌려가서 늦도록 혼인을 못한 외할아버지를 소개받게 되어 당사자들끼리 대면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사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당시, 할머니는 할머니의 부모님이 준비해 주신 꽃가마를 타고 시중 들어주던 언년이와 함께 혼인식에 왔단다. 그런데 그에 비해 나의 외할아버지 집은 넉넉한 형편이 못되어 꽃가마와 언년이를 받아줄 수 없다며 신부만 맞이하고는 할머니의 꽃가마와 언년이는  신부집으로 쫓아 보냈다는 것이다.

 외할머니는  주인을 잃은 언년이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며 떠나갔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진다고 하셨다. 그 후론 언년이를 만난 적이 없단다. 아니 만날 수가 없었단다.

 혼인 예식이 끝나고 외할아버지는 며칠 후에 만주로 떠나셨고 열일곱 살 어린 신부는 수십 명의 대가족 식솔들을 건사하는 혹독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단.

시집살이가 어찌나 고되던지 첫째 아기를 유산하고도 아프다는 표현도 하지 못한 채 노예처럼 일만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외할아버지와 혼인한 것을 후회하는 이유였다.




외할머니의 시어머니 그러니까 나에겐 외증조할머니께서는 신랑도 부재중인 어린 신부에게 온갖 집안일을 시키시면서도 그분의 텃새와 구박이 끊이질 않았단다. 외할머니는 친정에서는 집안일이나 허드렛일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 시집와서 많은 일들을 도맡아야 하니 너무도 힘들어서 도망칠 계획을 했다고 한다. 옷가지와 보따리를 준비해서 식구들 눈을 피해 몰래 나가려고 하던 찰나에 입덧이 시작되어 미루게 되었단다. 그 뒤로 그분의 맏딸인 나의 어머니를 낳으셨고 연달아 첫째 이모를 출산하느라 도망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셨다.

 여자들에게 "시집살이"라는 말은 그냥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온갖 소외와 학대, 그리고 약자로서의 을 의미한단다.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시집온 여자에게 그 탓을 돌리곤 했단다. 집안의 소득이 줄면 새댁이 재수 없어서 그리 되었다고 수군대고, 우안이 생기면 새댁이 들어와 마수가 좋지 못해서 생긴 것이라 했단다. 한 번은 외증조할머니의 은가락지 한 개가 없어졌는데 온 식구들이 갓 시집온 외할머니에게 손가락질하며 절도범 취급을 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어찌나 억울한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도 빨래를 하면서도 서러운 눈물을 쏟았는데 당시엔 그 누구에게도 억울하단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단다. 물론 할머니의 말을 들어줄 사람도 믿어줄 사람도 없었기에 할 수 없었단다. 그리고도 줄줄이 딸을 낳게 되니 아들도  낳지 못하는 재수 없는 년이라고 시집 구들이 대놓고 구박을 하는데 외할머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단다. 딸자식이라 해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어여쁘고 귀하기만 한데 뭐 그리 아들 아들 하는지 자기들도 여자면서 여자들이 여자를 차별하는 걸 보면서 별꼴이라 생각 들었단다. 외할머니는 당신의 머리를 치면서 말씀하셨다. "그때 이 맹추 같은 게 왜 한마디도 하지 못했을까" 생각할수록 한이 되고 후회스럽기 짝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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