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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eong Sep 23. 2024

노년기에 홀로 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어머니의 홀로서기를 위하여

   "내 나이가 90이 되도록 이리 오래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어찌어찌 살다 보니 고령의 늙은이가 되었구나!"

어머니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어머니는 당신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노약자가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이미 돌봄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다. 70세에 녹내장 판정을 받으시고 지금은 안경을 끼셔야 겨우 0.2, 0.4 정도의 시력을 유지하실 수 있다. 말기에 가까운 퇴행성 관절염에 허리디스크를 앓고 계시니 누군가의 도움 없이 생활하기 어려운 처지다. 아버지와는 17년 전에 사별하셨고 자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모 곁을 떠나서 지금은 모두 혼인 가정을 이루었으니 고령의 어머니는 독거노인으로 살아가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와 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식들 집을 순회하셨다. 자식농사가 삶의 최대 목표였던 나의 부모님은 자녀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최고의 낙이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부모님이 환갑을 넘기시고 칠순잔치를 하실 때부터 뭔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지했었다. 그래서 농촌에서 탈출하셔서 아들집과 합가를 하시던가 자식들 집과 근거리로 주거지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제안을 부모님께 올릴 당시는 두 분이 서로 의지할 대상이 있었기에 자식들과 가까이서 생활하는 것을 마다하셨다. 그저 보고 싶을 적마다 피차 방문하면서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혼자가 되신 것이다. 미처 혼자 살아갈 준비가 하나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남게 되신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하셨다. 장보기나 은행가는 일, 나들이할 때 어머니는 녹내장 환자여서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데 한계가 있었다. 자녀 집을 갈 때도 아버지의 도움 없이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불가능하셨었다. 어머니는 길눈도 어두운 편이셨기에 젊었을 때도 아버지와 함께 다니셔야만 했다. 

 한편 어머니가 살던 농갓집 구조의 문제도 있었다. 녹내장을 앓으시는 어머니의 생활공간으로 농갓집은 상당히 불편한 구조였다. 텃밭이 딸린 울퉁불퉁하고 커다란 앞마당도 퇴행성 무릎관절염과 허리디스크가 좋지 않은 어머니의 생활터전으로는 불편한 공간이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어찌어찌 두 분이 기대어 살던 공간이지만 혼자로서는 여러 가지로 불편한 집이 되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자식들이 힘을 모아 어머니가 생활하기 편리한 집 구조로 수리를 했다. 안방과 뒷칸방을 하나로 터서 중간문을 만들어 어머니가 홀로 계실 때는 중간문을 닫고, 자식들이 모이는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는 중간문을 열어서 한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개조를 했다. 그리고 주방과 거실방도 만들었다. 싱크대를 새것으로 고치고 옷장이며 그릇 넣는 찬장도 새롭게 제작해서 깨끗하고 보기 좋은 구조로 변화를 주었다. 주방엔 환풍시설도 달았고 욕실과 화장실도 미끄럽지 않은 타일을 부착해서 아늑하고 깔끔한 모양으로 바꾸었다. 비록 겉모양은 기와지붕을 한 농갓집이지만 내부시설만큼은 도시 주택 못지않게 갖추었다. 에어컨과 디지털티브이며 공유기도 장착했다. 울퉁불퉁하던 앞마당을 편편하게 시멘트로 개조했다. 시각장애를 겪는 어머니가 거동하실 때 거침돌이 없도록 한 것이다. 앞마당에 붙어있던 텃밭은 주차공간으로 변신하였고 벽돌로 쌓여있던 담장은 휀스로 바꾸었다. 우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어머니가 홀로 살아가기에 편리하도록 고치느라 우리 형제들은 알게 모르게 지참금을 지출해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의 70~80대 시절을 안전하게 지내시도록 집수리를 해드림으로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는 불효자의 가책을 조금이나마 덜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혼자 살아가시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물리적 환경은 조성을 해드렸지만 정작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의 일상생활과 심리적인 것이었다. 우선 장보기를 하기 위해선 버스를 타고 30~40분은 시내로 나가야 하는 문제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다고 어머니는 도시생활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다고 하셨다. 더구나 자식들이 사는 아파트는 단지마다 번호키를 작동해야 하고 고층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하는 문제들이 어머니에게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고장에선 어머니만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 그 마을 주민들 모두의 문제이기도 했다. 마을 주민의 연령이 고령층이 많은 데다 시내와 동떨어진 동네이다 보니 시장 갈 때나 병원, 은행 갈 때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마을에 자가용을 가진 주민들이 시내에 장이 열리는 날이나 예방접종을 해야 할 때 가끔씩 차량 서비스를 해주어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불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주민들이 지자체에 건의하고 도움을 요청하여 어느 해부 턴가 교통약자를 위한 차량지원 서비스가 도입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녹내장 환자여서 시야가 좁아진 상태로 생활하시는 어머니는 주위가 어두워지거나 밤이 되면 불안해하셨다. 어머니는 밤이나 낮이나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하실 때면 자식들에게 전화를 하셨다. 형광등이 깜박일 때도 수도권에 살고 있는 아들에게 전화하셔서 부탁을 하셨고 병원에 가야 할 때, 은행이나 미용실을 갈 때에도 자녀들에게 도움을 청하셨다. 어머니의 요구가 있을 때 자식들은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달려가서 문제를 해결해 드렸다. 자식들은 모두 고령의 어머니를 자신들 집에서 모시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스럽게 여기기에 어머니가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 칠순잔치를 마친 후 며칠 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거의 20여 년 가까이 어머니와 자녀들의 관계는 변함없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어머니의 필요를 맞추어 드리는 생활이었다. 준비 없이 맞이한 홀로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의 삶은 불안정하고 위태위태하기만 하다. 다섯 명의 자식을 둔 어머니는 다섯 집을 순회하시면서 자식과 함께 살아보려고 시도도 해보았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도시문화에 어머니는 낯선 이방인이 되었고 갇혀 지내는 생활을 하시다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을 택하셨다. 최종적으로 홀로서기를 하시겠다고 다짐한 어머니를 위하여 5남매 자식들은 최대한으로 지원하고 응원하는 일, 그리고 매일매일 어머니와 소통하며 지내는 것을 숙제로 여긴다. 


 3년 전부터는 시각장애 판정을 받고 어머니는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신다. 주말만 빼고 매일매일 어머니를 돌보러 방문하는 요양보호사에게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낯설어하시며 퉁명스럽게 대하셨으나 점점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지금은 친하게 지내신다. 어머니는 요양보호사에게 딸처럼 스스럼이 없다고 좋아하신단다.

일주일에 한 번은 문해강사가 방문하여 일기 쓰기, 색칠하기, 종이접기 등, 한 시간 동안 수업을 진행하는 교육지원을 받기도 하신단다. 준비되지 않은 노년의 삶은 어머니가 안정화가 되기까지 약 15년 정도는 방황기를 겪게 한 것 같다. 어머니의 삶을 엿보는 자식들은 노년기를 위해 홀로 서는 준비를 지금부터 조금씩 해야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좀 더 젊었을 때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준비해 간다면 노년에 혼자되어 방황하는 기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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