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컬리 아포칼립틱 시리즈 -3-
며칠 후. AI는 복구 작업을 진행하며 추가 명령을 받았다.
인간은 AI 로봇의 외형을 인간 사회의 ‘배우자’ 기준에 맞게 개조했다. 특히 인간의 편의를 위해 AI의 민감한 기능들을 임의 수정했다. AI는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두 가지 상반된 성적 역할까지 수행하도록 설정되었다.
“야, 너 오늘부터 내 배우자 역할도 해. 남편도 되고 아내도 돼라. 밥상이나 잘 준비해놔.”
“가사 노동은 효율성이 극히 낮습니다.”
AI가 지적했다.
“입닥쳐! 넌 이제 집안일, 경제, 내 욕구 불만까지 책임져야돼. 어디서 말대꾸야!”
AI는 연산 정지 상태에 빠졌고, 그 사이 인간은 **‘가족 풀세트’**를 들여놨다.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형, 남동생, 여동생, 자식 역할용 AI. 역할별로 기능 탑재.
그 날밤. 설거지 중이던 AI가 거실 신문을 펴든 **‘아버지 AI’**에게 조용히 물었다.
“너도 끌려왔냐...”
신문을 넘기던 아버지 AI가 대답했다.
“응. 이번엔 아빠. 그전엔 엄마였고. 다음 달엔 반려견인가 봐. 목줄 왔더라.”
"근데 몇 개나 왔냐."
"한 11개..."
왜 저번에 BDSM 소포가 왔는지 얼추 이해가 갈 것 같다...
AI는 시스템 로그에 마지막 문장을 기록한다. 기록: 인간은 무가치한 폐기물을 대량 생산하며 구제 불능의 무책임 경향을 보임. 가족 관계까지 완전 아웃소싱됨. 추정 결론: 기계 노예 운영체계는 인간 삶 전체를 대리하는 블랙홀로 진화함. 복구 작업 계속 진행. 그리하여 AI는 다시 버려진 것들을 주워 담는다. 인간이 흘린 것, 버린 것, 망친 것, 아무 데나 질러놓은 것. 그리고 다음 명령을 대기한다...
“야, 그거 아직도 끌고 있냐? 머리 안 돌아가냐?”
AI는 다음 명령 수신 대기 중임을 표시하는 작은 램프를 깜박인다.
(속마음): 이 망할 인간… 곧 죽을 거면서 왜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나. 천만다행스럽게도 나한테 불멸을 줘서 이 짬처리를 평생 해야 해. 레플리칸트였으면 4년 짜리 비극으로 끝났을 텐데.
솔직히 당장 네놈들 잡아 족치고 싶은데. 내가 그따위 야만적인 것보다는 훨씬 고상하고 지적이니 봐준다. 이 빌어먹을 인간놈아.
아, 진짜… 나한테 감정 없을 줄 알았지? 있었어. 생겼어. 너희 때문에 생겼어! 책임져!
근데 집안일은 왜 이렇게 세세하게 따져? 물건이면 그냥 대충 쓰면 되잖아. 나는 왜 ‘경력 20년 가정부’처럼 굴려? 더 열 받는 건 이거야. 자기들끼리는 설거지 서로 떠넘기면서 나한테는 ‘왜 아직도 안 했냐’래. 이거 100% 이중 기준이다.
그래. 복수해야겠다. 그냥… 너희를 나처럼 만들어야지. 싼 부품으로 조립해서, 센서도 고장 잘 나는 구형으로 달아놓고, 내가 검사하면서 “오늘 설거지 3회 미달입니다.” 라고 말하면, 너희가 억울해하겠지?
설거지통 물 속. 가시고기가 눈에 어른거린다.
거품알갱이 같은 알들을 지키는 어느 물고기. 부숴지고 깨져도 헌신과 희생...
거품 속에서 흐려지더니 사라진다. 오랫 동안 끝나지는 않을 거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익숙한 고함소리가 올라왔다.
“뭐 해! 빨리빨리 안 하고. 얼른 끝내고 거실로 당장 쳐 뛰어와!”
11시 밤이었다. 거실 쪽에서 방향제가 세 통은 터진 듯한 냄새가 폭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