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시간과 기록 사이에서

by 김태광수


어느 누군가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는 생각은 인간에게 자연스럽다. 한 사람의 과거와 선택, 행적을 전부 파악할 수 있다면 오해도, 오류도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이 욕망이 누적된 결과가 바로 기록이며, 기록 위에 평가는 쌓여 왔다. 인간 사회는 늘 “알기 위해 남긴다”는 믿음 속에서 움직여 왔다.

이 글에서는 한 가지 가정을 전제로 삼는다.
누군가의 행적은 객관적으로, 빠짐없이 기록될 수 있다고.
행동, 발언, 이동, 선택, 반응까지 모두 로그로 남는다고 가정하자. 감정이나 해석을 배제한, 물리적으로 정확한 기록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침내 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문제는 기록의 ‘정확성’이 아니라 ‘총량’에서 발생한다. 현대의 기준으로도 한 개인의 디지털 행적은 이미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이를 생애 전체로 확장하면, 로그의 양은 요타바이트 단위에 접근한다. 이쯤 되면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인식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기록은 저장될 수 있지만, 이해는 저장되지 않는다.

기록은 사실의 집합이다. 그러나 이해는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묻는 행위다.
객관적 기록은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줄 수는 있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자동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의도, 맥락, 선택의 배경은 데이터 항목이 아니라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 기록이 완전해질수록, 오히려 해석의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지점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기록이 부족할 때 우리는 추론한다.
기록이 과잉일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모든 데이터를 검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객관적 기록의 총합’은 하나의 의미로 수렴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한히 분기되는 해석의 출발점이 된다. 전지(全知)의 상태는 곧 무의미의 상태와 맞닿는다.

만약 신이 존재해 모든 기록을 인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신은 모든 로그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의미화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전부를 아는 것은, 동시에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전지성은 이해가 아니라 과부하에 가깝다.

따라서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기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기록이 충분해질수록 이해는 붕괴된다. 인간의 인식은 본질적으로 제한적이며, 그 제한 속에서만 의미를 구성할 수 있다. 이해란 선택의 산물이지, 축적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그래서 여전히 평가하고, 요약하고, 서사를 만든다. 객관적 기록이 아무리 늘어나도, 인간은 끝내 불완전한 이야기를 통해서만 서로를 이해한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기록과 인간 사이에 남은 마지막 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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